‘금융계 로비스트’ 김재록씨를 둘러싼 검찰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검찰은 은행 대출을 알선해주고 14억원을 챙긴 혐의로 김씨를 구속한 지 이틀 만인 26일 현대·기아차 본사를 전격 압수수색했다. 수사의 칼 끝이 김씨 개인비리로 향하다가 재벌그룹의 비자금 조성 쪽으로 과녁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검찰 고위 관계자는 “김씨가 외환위기 이후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깊숙이 개입했다”며 “수사의 최종 목표는 김씨의 배후 인물”이라고 공공연히 밝혀 수사가 정·관계 고위 인사들로 확대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김씨를 오랫동안 ‘잠재적 피의자’로 주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 1월 김씨를 체포했으나 구속영장을 청구하지도 못하고 하롯만에 풀어줬다. 대검 중수부 관계자는 “언론에 체포 사실이 알려지는 바람에 수사를 망쳤다”며 푸념만 늘어놨다. 그러나 검찰은 23일 김씨를 다시 체포했다. 이번에도 김씨 구속에 실패한다면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검찰은 이튿날 김씨의 구속영장을 받는 데 성공했다.
검찰이 이처럼 망신당할 ‘위기’를 무릅쓰고 김씨 수사를 강행한 것은 이번 수사가 예사롭지 않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은행 대출 알선 등 김씨의 개인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검찰 안팎에서는 김씨가 김대중 정부 시절 고위 경제 관료와 금융권 최고위층 인사들을 상대로 쌓아온 ‘인맥’에 주목하고 있다. 김씨가 외환위기 이후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자신의 인맥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김씨는 현 정권에서도 부실기업 인수합병에 폭넓게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전·현 정권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초대형 권력형 비리로 비화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현대·기아차 본사를 전격 압수수색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검찰 수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기업을 정면으로 겨냥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검찰은 “현대차 전반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단 선을 그었지만, 국민 경제에 미치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압수수색을 한 것은 뭔가 ‘큰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현대·기아차 사업과 관련해 김씨가 수십억원대의 로비자금을 받은 의혹이 있다”며 “부실기업 인수에 개입하거나 금융기관 대출 알선 대가로 금품을 받은 것과 다른 비리 유형일 수 있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가 현대차 비자금 전반에 대한 수사로 확대될 수도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또 글로비스가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설립하고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최대 주주로 있는 회사여서, 검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번 압수수색이 현대차 그룹의 ‘후계 구도’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이춘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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