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선감학원은 1942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동원할 인력양성을 위해 설립했다. 해방 뒤인 1946년 2월부터 1982년 9월까지는 경기도가 서울의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기관으로 운영했다. 8~19살의 아동 및 청소년들은 이곳에 갇혀 굶주림과 강제노역, 폭언·폭행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다. 수용인원이 가장 많았던 해는 1956년으로 407명이었고, 입소자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62년으로 558명이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0월 선감학원 수용자 전원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와 올해 선감학원 수용 아동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와 유품 등을 수습했다. 25일 오전 경기 안산 선감도 선감동 37-1 지점에서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유해발굴’ 공개설명회를 열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탈출하다 익사하거나 맞아 죽어 묻혀도 울면서 노래밖에 불러줄 수 없었다는 이창규씨. 고경태 기자
25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주최로 열린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유해발굴’ 공개설명회 현장에는 20명 넘는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번 유해발굴 현장인 선감동 37-1 지점이 예전에 뽕밭이었고, 주로 탈출하다 익사해 숨진 이들이 많이 묻혔다고 했다. 이들은 설명회가 시작되기 전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자신들이 겪은 피해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기절할 때까지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다들 10대 초반에 겪은 일이다.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번 유해발굴 결과 공개된 139호 무덤과 유품 앞에서 “이 무덤은 9살 광수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곽은수씨. 고경태 기자
곽은수(63)씨는 9살 되던 1969년부터 선감학원에 들어와 1977년까지 9년간 선감학원에 있었다. 그는 유해발굴 현장 길가에 있는 139호 무덤을 가리키며 “이곳은 광수의 무덤”이라고 말했다. 1974년 여름 동생뻘 되는 9살짜리 김광수를 이곳에 묻을 때 옆에 있었다고 했다. “당시 광수는 여름방학인데 집에 가고 싶다고 매일 징징거렸어요. 다들 저수지로 목욕을 가는데 숨어있다가 걸려 곡괭이로 무지하게 맞았지요. 맞고 나서 할 수 없이 목욕하러 따라갔는데 나중에 저녁에 점호할 때 보니 한 명이 비는 거예요. 광수였죠.”
25일 오전 유해발굴 공개설명회가 열리는 동안 피해생존자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고경태 기자
광수는 저수지에서 발을 헛디딘 것 같았다. 어른들이 시신을 수습해와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다른 시신이 보였다. 예전에 다른 시신을 묻은 자리에 겹쳐서 광수를 또 묻은 것이다. 곽은수씨가 139호 옆에 놓인 유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하복 단추도 있고 동복 단추도 있죠. 하복 단추는 그해 여름 저수지에서 빠져죽은 광수 거예요. 동복 단추는 광수를 묻을 때 옆에 있던 다른 시신의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생존자들은 곽은수씨를 가리키며 “별명이 빠삐용이었다”고 했다. “제가 6~7번 마산포 쪽으로 탈출했어요. 한번은 탈출에 성공했는데 수원까지 갔다가 잡혀왔고요. 처음 탈출에 실패해 돌아왔을 때는 막 때리더니 그래도 계속 탈출하니까 나중에는 잡혀와도 가만 놔두더라고요.”
위험한 갯벌을 어떻게 건넜을까. “무섭죠. 아이들이 물때를 몰라 갯벌에서 많이 죽었어요. 저는 물때를 알기 위해서라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탈출할 때마다 서너명씩 데리고 갔어요.”
이아무개씨가 친구의 것이라고 증언한 137호의 굴 따는 칼. 고경태 기자
이아무개(63)씨는 이번 유해발굴에서 나온 쇠조각 유품을 보고 “친구의 굴 따는 칼”이라고 증언해 공개설명회 자리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울면서 말했다.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친구 하나가 ‘반드시 탈출에 성공해 너희 부모와 함께 너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이 칼은 그 친구가 쇠를 갈아 만들었던 칼이라 기억이 나요. 이걸로 배고플 때 바다에 나가 굴을 따먹었어요. 하지만 그 친구는 탈출하겠다고 사라진 뒤 얼마 안 있어 바다에서 시체로 떠밀려왔어요. 그 친구 이름도 몰라요. 이렇게라도 여기서 밝혀줘야 그 친구도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중욱(선감학원 당시 이름은 박재환, 60살)씨는 13살 때 의정부 철둑길에 앉아있다가 함께 있던 친구 11명과 함께 경찰에 잡혀간 뒤 선감학원에 왔다. 집이 경찰서에서 10분 거리라고 하는 친구들도 풀어주지 않았다. “겨울이면 강화도 쪽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해빙이 밀려왔어요. 그 눈덩어리에 빠져 죽은 아이들도 많아요.”
조희갑(67)씨는 “누군가 탈출하면 그 원생이 잡혀 오거나 시체로 돌아올 때까지 전체 원생이 밖으로 나와 기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기합을 어떻게 당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저는 70명의 원생한테 각자 두 대씩 곡괭이로 맞은 적 있어요. 반장 위에 있는 사장(舍長)이 시키는 거예요. ‘광대’라고 하는 건 일렬로 세워놓고 한 사람씩 잡아 마룻바닥에 막 던지는 걸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갈비뼈나 다리가 부러진 아이들이 많았어요. ‘고춧가루’란 뺨을 바닥에다 밀착시키게 한 뒤 밀어버리는 거였고, ‘초코초코’는 손이 얼었을 때 정신봉이라는 몽둥이로 손톱을 때리는 걸 가리켰죠. 가지가지 방식으로 어린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혔어요.”
이창규(66)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고향 수원 거리에서 놀다가 잡혀 왔다. 옷이 더러운 아이들은 죄다 잡아갔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원생 중 10%는 선감초등학교에 보내주었는데, 이씨는 학교에 다닌 축이었다. 어린 시절에 죽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고 했다. “선생들도 때렸지만 선배들도 때렸죠. 한 대, 두 대, 네 대, 여덟 대, 열여섯 대, 서른 두 대, 쉰 여섯 대. 제가 쉰 여섯대까지 맞아봤어요. 까무러쳤죠. 아휴, 성폭력도 엄청 많았어요.” 맞아 죽은 아이, 의무실에 있다 죽은 아이들을 매장하는 걸 수없이 목격했지만 나이가 어려 거들지는 못했다.
이창규씨는 아이들이 묻힐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울면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즉석에서 그때의 그 선감학원가를 읊조리듯 불러주었다.
“바닷가 자갈들도 우리하고 놀고요. 별들도 우리하고 놀아요. 많기도 하구나 우리들의 형제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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