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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3일 세계농아인대회로 제주도를 찾은 청각장애인 싱가포르인 부부와 말레이시아인은 한 테마파크에서 황당한 일을 당했다.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카트 탑승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해당 테마파크 이용약관 어디에도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탑승이 어렵다는 말은 없었다.
이들은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거부하는 곳은 없었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도로교통법에도 청각장애인은 면허 취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발달장애인 임영조(28)씨도 지난해 롯데월드를 찾아 ‘범퍼카’를 타려고 했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장애인 우선 입장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직원에게 장애인복지카드를 보여줬지만, 직원은 “발달장애인은 혼자 놀이기구를 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임씨는 다 큰 성인이 왜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30일 오후 ‘놀이시설 장애인 차별 사례발표 및 대안 모색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사례 발표를 하고 있다. 고병찬 기자
장애인들이 맞닥뜨린 놀이시설 차별 사례가 30일 국회에서 소개됐다. 이날 모인 장애인 당사자들은 놀이시설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장애’만으로 놀이시설 이용을 거부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증언했다.
제주도 사례를 소개한 청각장애인 통역사 이목화(48)씨는 “제주도 사례는 우리나라 놀이시설의 장애 인식의 현실을 보여준 사례”라며 “지금까지 장애인 부주의로 놀이공원에서 사고가 난 적이 없다. 위험하다고 무작정 탑승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는 이날 오후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등과 함께 국회의원회관에서 ‘놀이시설 장애인 차별 사례발표 및 대안 모색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놀이시설 장애인 차별을 막을 정책적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30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청각장애인 통역사 이목화(48)씨가 놀이시설 장애인 차별 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고병찬 기자
장애인 당사자들은 놀이시설 곳곳에서 겪는 차별이 일상적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인 곽남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활동가는 “비장애인들은 ‘힐링’을 하러 놀이동산을 많이 가지만, 장애인들은 아예 가본 경험이 없는 경우도 많다”며 “놀이공원엔 점자블록도 없는 등 접근성이 떨어지고 동반자가 없으면 기구를 타기 어려워 방문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거나 자신이 장애인인 부모들은 더 막막하다. 서은석 서울장애인부모연대 사업국장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15살 아들을 키우는 한 회원은 지난 5월 롯데월드에서 보호자 없이는 아이 혼자 롤러코스터를 탈 수 없다고 해 결국 탑승을 포기하기도 했다”며 “혼자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능숙하게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아이들을 막는 건 명백한 차별”이라고 했다.
2010년대 초반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등을 통한 문제 제기가 시작된 놀이시설 장애인 차별 문제는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인 상황이다. 에버랜드가 시각장애인들의 티익스프레스 등 놀이기구 탑승을 거부한 것에 대해 법원이 ‘롤러코스터, 범퍼카 등 7개 놀이기구의 탑승을 금지한 에버랜드 가이드북을 수정하라’고 2018년 판결했지만, 에버랜드 쪽이 불복해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에버랜드 관계자는 “관광진흥법상 사고 책임이 운영자에게 있기 때문에 놀이기구 제조사가 장애인 탑승이 어렵다고 한 경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탑승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 시각장애인의 경우 45개 기구 중 38개에 탑승이 가능하다. 재판을 통해 기준이 정해지면 장애인 편의를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지난 2018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이 ‘시각장애인 놀이기구 이용 거부 차별구제청구소송’ 판결 선고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론회에선 해외 사례를 참고해 장애인들도 놀이시설 이용에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정책적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디즈니랜드의 경우 휠체어를 탑승한 채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마련돼있고, 인지 장애 및 자폐 고객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구비돼 있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놀이시설을 찾는 장애인들을 고객으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정부는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사업주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운영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