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10월항쟁 유족회 채영희 회장·항쟁 기억 시민모임 꾸리는 신영철 김명숙씨
신영철(왼쪽부터) 대표와 채영희 회장, 김명숙 대표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채영회 회장이 지난 10월 이재갑 사진전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신영철 대표 제공
1946년 미군정 실정 맞선 민중투쟁
대구서 시작해 73개 시군으로 번져
“유족 도와 시민들이 항쟁 알릴 터
대구, 2·28의거 등 저항 지향적 도시
원래의 대구로 되돌아갈 수 있어” 채 회장 “진실규명 창구 상설화하길” 그의 조부(채충식)는 일본 강점기에 신간회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해방 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고 1948년에는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여하려고 김구 선생 등과 함께 삼팔선을 넘기도 했다. 하지만 10월 항쟁은 대구 달성군의 이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 집안에 큰 시련을 안겼다. “한국전쟁 뒤에도 사찰 형사가 우리 집에 살다시피 했어요. 아버지를 학살하고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찰 경찰은 우리 동네에 들어오면서부터 ‘저 빨갱이 집 아들이 이북에서 내려올지 모른다’고 떠들었죠. 연좌제가 사라진 80년대 후반까지도 ‘아버지 안 왔냐’며 경찰이 찾아왔어요.” 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20대 때는 “사찰 경찰의 여성 인권 유린에 저항하다 심하게 얻어맞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 번은 경찰이 저를 지프에 강제로 태우고 어디론가 끌고 가더군요. 그때 제가 탈출을 시도하면서 차가 전복돼 머리를 심하게 다쳤죠. 이런 모습을 본 어머니가 ‘그러다 네가 죽겠다. 경찰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서라도 끝내 살아남아 아버지의 억울함을 꼭 풀어달라’고 하시더군요.” 스무살이 넘어서야 부친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는 채 회장은 10월 항쟁과 관련해 두 가지 바람을 말했다. 첫째는 진실규명 신청 창구의 상설화이고 다음은 역사 교과서에서 항쟁을 바로 기술하는 것이다. “정권에 따라 진실규명 신청 창구를 열고 닫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번 2기 진실화해위에서도 유족회 회원 50명이 낸 신청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이 났습니다. 2기 신청 기한은 지난해 12월 끝났는데요. 그 뒤에도 신청 문의를 하는 유족 전화를 여럿 받았습니다. 진실화해위 존재를 모르는 유족들이 지금도 있어요. 그들이 언제든 진실규명 신청을 하도록 신청 창구를 상설화해야죠.” 그는 이어 “10월 항쟁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당한 항쟁이었음을 교과서에 분명히 기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 항쟁 당시 ‘포승줄에 묶어가는 낭군님아 군정재판 받더라도 강제공출 반대하소’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여성들이 많이 불렀어요. 그만큼 당시 미 군정의 잘못된 식량 정책에 대한 반감이 컸다는 거죠. 10월 항쟁은 또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해 역사를 뒤틀려고 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였어요. 이게 혁명이고 항쟁이지 어떻게 폭동입니까. 하지만 현 역사교과서는 대부분 이런 의의를 외면하고 있어요.” 시민 모임은 아직도 10월 항쟁하면 빨갱이를 떠올리는 대구 시민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아직 사업 내용이 구체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았는데요. 예술가들이 10월 항쟁을 주제로 춤이나 노래, 연극, 그림 등 예술작품을 창작하도록 지원하고 아울러 항쟁 자료조사를 포함한 연구 활동과 카툰 제작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김명숙 대표는 지난해 채 회장과 제주 4·3기행을 하면서 10월 항쟁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그는 10월 항쟁의 진실을 알아 가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가족사가 떠올랐단다. “작은 조부가 일제 때 만주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하셨는데요. 그 분 때문에 우리 집도 연좌제 피해를 봐 남동생이 원하던 육사 진학을 포기했어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피난 간 부산에서 방직공작을 다니며 노동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다행히 큰 고초를 겪지는 않으셨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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