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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손석춘편지] ‘결사항전’ 앞둔 대추리의 침묵

등록 2006-05-03 13:34수정 2006-05-04 00:54

경기도 평택의 대추리를 다녀온 한 젊은 벗이 편지를 띄웠습니다. 30대 초반 청년 노동자인 그의 편지가 오늘 저의 눈을 슴벅이게 합니다.

“집회 현장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생기 넘치는 피켓이, 웅성거리는 결의가 떠나고 나면 남겨지는 텅 빈 일상. 얼룩진 하늘과 생채기 난 바람, 아무것도 모른 채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슴벅거렸습니다. 물기 마른 논바닥에서, 인적 없는 마을 어귀에서 이곳에 다시는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맞닥뜨리면 그땐 제가 슴벅거렸습니다. 도리질을 쳤지요. 대추 초등학교 창문마다 그려진 토박이 농민의 얼굴을, 비어있는 벽마다 그려진 시와 그림을, 경운기에 매달린 평화를 갈구하는 깃발을, 이 길을, 이 꽃길을, 이 흙내음을, 바람 섞인 이 흙내음을 값싼 철로 녹슬게 할 거라는, 터질 듯한 화약냄새로 시멘트 밑으로 발라져 버릴 거라는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추 초등학교. 눈빛 고운 아이들이 뛰놀던 그곳에서 이제 ‘흙내음’은 사치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대추 초등학교 안팎에는 시커먼 전운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다름아닌 대한민국 국방부가 ‘작전 개시’ 초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평택에 최첨단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걸 반대해 온 시민사회단체들에 국방부는 살천스레 ‘정면 대응’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미군기지 이전사업단의 별 둘을 단 박경서 장군의 서슬이 시퍼렇습니다. “법적으로 정해진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시한(5월 7일)을 넘기는 것”은 “국방부의 직무유기”랍니다. 박 소장은 “투입되는 병력”이 “비무장한 공병”이므로 ‘민군 간 충돌’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소를 머금게 합니다. 비무장한 공병이기에 ‘민군 충돌’이 아니라는 게 과연 ‘장군’이 할 말 일까요? 군 병력이, 군 헬기가 투입되는 상황을 교묘히 호도하는 기만극입니다.

국방부는 미군 기지 예정지에 25km에 이르는 철조망을 둘러싼 뒤 그곳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할 계획입니다. 투입되는 공병부대의 작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보병부대도 투입할 예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평택의 대추리에는 흙 향기 아닌 폭력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국방부가 여론에 밀려 시작한 대화는 처음부터 한계가 또렷했습니다. 미군기지 확장이전 자체는 결코 대화의 대상이 아니랍니다. 기지 확장이전에 반대하는 국민과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 뒤 언죽번죽 그것은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는 국방부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요. 차라리 대화를 거부하는 게 솔직한 자세 아닐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평택에 건설될 최첨단 미군기지가 결코 대추리의 평화만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남과 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평화를 위협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한 상황이기에 위험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평택 미군기지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한미동맹’에도 명백히 어긋납니다. 대추 초등학교에 모인 사람들이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결사항전은 대추 초등학교를 지키겠다는 항전이 아닙니다. 대추리 농민을 지키겠다는 ‘결사’가 아닙니다. 이 땅을, 이 땅의 민중을, 이 땅의 겨레를 지키려는 항전입니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대추리의 위기가 위기로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대다수 신문과 방송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위기로 보도하지 않아서입니다. 그 전제 위에서 냉철히 톺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언론에만 돌을 던져도 되는 걸까요? 편지를 보내온 젊은 노동자는 “대추 초등학교 창문마다 그려진 토박이 농민의 얼굴을, 비어있는 벽마다 그려진 시와 그림을, 경운기에 매달린 평화를 갈구하는 깃발”을 “터질 듯한 화약 냄새로 시멘트 밑으로 발라 버릴” 주체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미군이, 노무현이, 그리고 침묵만 하고 있는 내가.”

그렇습니다. 미국이, 그에 용춤 추는 노무현 정권이, 그와 결탁한 친미사대언론이,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대화를 거부하는 저들은 마땅히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젊은 노동자의 날카로운 성찰은 싸워야 할 대상을 한 사람 더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침묵만 하는 나”입니다. 편지를 주신 또 다른 청년 노동자의 표현을 빌리면 “폭력에 길들여지고 있는 나”입니다.

(기획위원/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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