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작전으로 초토화된 평택
경찰과 군, 1만 5천여명을 투입한 평택의 군사작전은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충돌, 대치, 진압, 접수등 무시 무시한 말을 사용하는 언론들의 보도도 그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평택 초토화는 무찔러야할 적을 대상으로 하는 무자비한 군사작전같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나는 새삼 이번 작전을 계획한 지휘관들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경찰과 군대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진입할지에 대해 지도를 펴놓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점, 효과적인 작전을 위해 새벽이라는 시간을 택한점, 군대와 민간인의 충돌을 줄이기위해 병력은 부교를 통해 강을 건널 계획을 세운점(아쉽게도 이 작전은 경찰들의 강력한 진압효과로 빛을 볼 수 없었다), 주민들의 봉쇄를 효과적으로 피해 철조망을 설치하기위해 헬기를 동원해 철조망을 공수한점,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체육복 차림으로 등장하는 모습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의 작전은 완벽하고 스펙타클 했다.
다만 무엇이 그들로하여금 이토록 철저한 군인정신을 발휘하게 하는가하는 것이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과연 군사작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윤광웅 국방장관은 작전 개시후 가지 담화문에서 그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며 더 이상의 일정지연은 혈세낭비라고 언급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또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거들었다.
그러나 이번 군사작전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대화를 거절한 채 걸핏하면 공권력을 동원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공권력만능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미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이러한 관행은 시작되었다. 정리해고와 민생위기에 직면한 소외 계층들의 파업현장과 각종 시위를 정부는 대화로 해결하기보다 무조건적으로 억누르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오히려 문민정부로 바뀐 이후 경찰들의 시위진압방식은 더욱 첨단화, 세련화되었으며 진압을 위한 전담기동대의 창설이라는 어이없는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결국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인가. 정당한 공권력의 확립이었나. 아까운 농민들의 목숨을 두 명이나 앗아가지 않았던가. 아니 오히려 그만한 폭력적인 진압을 무수히 자행하고도 2명 밖에 죽지 않은 일이 기적같은 일이다.
정부는 대화를 거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런 시위가 있을 때쯤 노무현 대통령이 때만 되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시위 방식도 변해야한다고. 그러나 정작 노무현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어 살기 좋아졌다고 이야기하는 지금에 파업이나 시위같은 살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이 더 늘어나고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게라도 나서지 않으면 먹고살지도 못할만큼 찌들리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왜 대화로 하지 않느냐며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격이 아닌가. 국방장관은 주민들과의 대화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리고 대추리를 완전 진압한 지금에도 대화를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슨 최선을 다했는가. 물리력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놓고서 무슨 대화를 한다는 말인가. 군사작전을 계획하는 그 정성의 10분의 1이라도 진지하게 주민대표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화하자며 반대의견을 가졌다고 토론회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끌어내놓고 무슨 최선의 노력을 했단 말인가. 그러니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미단체의 조종에 놀아난 사람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주민들은 보상금이나 더 타내려는 악덕 주민으로 보일 수 밖에 더 있겠나. 공권력의 권위를 스스로 버린 경찰과 당국. 이런 시위를 보도하는 언론에서는 시위대와 공권력의 폭력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폭력은 나쁘다고. 그러나 공권력을 ‘공공의 권력’ 이라 칭하는건 그마한 이유가 있다. 시위대가 덤빈다고 또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똑같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면 사설 경비업체나 용역업체들을 쓰지 왜 공권력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는가. 시위대가 폭력을 휘둘러도 무조건 맞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권력 스스로가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을 수 있는 정말 최소한의 행동에 국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내와 절제, 통제된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이 나라의 경찰이란 지휘관들의 조폭 막무가내식 선동과 악당을 무찌르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대원들의 폭력소동으로 스스로 공권력의 지위를 버리고 말았다. 오늘 평택에서 벌어진 이 처참한 상황을 과연 불가피한 최소한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결국 이러한 무차별적인 공권력 집행은 정부 스스로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반대하는 주민들과 그 정도의 대화를 해서 풀겠다는 의지도 없다면 왜 대통령을 하는가. 왜 정치를 하는가. 그렇게 대화도 주도하지 못할만큼 무능하다면 차라리 자리를 내놓으라. 아니면 당장 이 비열한 공권력의 굿판을 거두라.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위가 있을 때쯤 노무현 대통령이 때만 되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시위 방식도 변해야한다고. 그러나 정작 노무현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어 살기 좋아졌다고 이야기하는 지금에 파업이나 시위같은 살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이 더 늘어나고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게라도 나서지 않으면 먹고살지도 못할만큼 찌들리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왜 대화로 하지 않느냐며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격이 아닌가. 국방장관은 주민들과의 대화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리고 대추리를 완전 진압한 지금에도 대화를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슨 최선을 다했는가. 물리력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놓고서 무슨 대화를 한다는 말인가. 군사작전을 계획하는 그 정성의 10분의 1이라도 진지하게 주민대표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화하자며 반대의견을 가졌다고 토론회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끌어내놓고 무슨 최선의 노력을 했단 말인가. 그러니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미단체의 조종에 놀아난 사람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주민들은 보상금이나 더 타내려는 악덕 주민으로 보일 수 밖에 더 있겠나. 공권력의 권위를 스스로 버린 경찰과 당국. 이런 시위를 보도하는 언론에서는 시위대와 공권력의 폭력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폭력은 나쁘다고. 그러나 공권력을 ‘공공의 권력’ 이라 칭하는건 그마한 이유가 있다. 시위대가 덤빈다고 또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똑같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면 사설 경비업체나 용역업체들을 쓰지 왜 공권력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는가. 시위대가 폭력을 휘둘러도 무조건 맞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권력 스스로가 더 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을 수 있는 정말 최소한의 행동에 국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내와 절제, 통제된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이 나라의 경찰이란 지휘관들의 조폭 막무가내식 선동과 악당을 무찌르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대원들의 폭력소동으로 스스로 공권력의 지위를 버리고 말았다. 오늘 평택에서 벌어진 이 처참한 상황을 과연 불가피한 최소한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결국 이러한 무차별적인 공권력 집행은 정부 스스로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반대하는 주민들과 그 정도의 대화를 해서 풀겠다는 의지도 없다면 왜 대통령을 하는가. 왜 정치를 하는가. 그렇게 대화도 주도하지 못할만큼 무능하다면 차라리 자리를 내놓으라. 아니면 당장 이 비열한 공권력의 굿판을 거두라.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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