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보다 안정 추구, 인권·약자보호 눈감기 일쑤
“‘그들만의 사법부’ 오명벗고 열린시각 담아야” 지적
“‘그들만의 사법부’ 오명벗고 열린시각 담아야” 지적
사법권력, 이젠 바뀌어야 한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초대형 인사가 임박한 가운데, 보수적인 정통 엘리트 법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두 기관이 ‘그들만의 사법부’라는 오명을 벗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대법원과 헌재는 과거보다 전향적인 판결을 내놓고 있으나 기업범죄에 관대하면서도 사회적 약자 보호에는 소홀하거나, 소수자 인권과 환경 등 미래 지향적 가치에 있어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잣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회적 약자 보호 소홀
2005년 신용카드 빚을 갚지 못하게 된 카드 사용자에게 사기죄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외면한 대표적인 판결로 꼽힌다.
당시 대법원 2부(주심 이강국 대법관)는 “과다한 부채의 누적으로 신용카드 사용으로 인한 대출금 채무를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했다면 기망 행위(속이는 행위) 내지 편취의 범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신용카드 사용자는 적법하게 승인된 한도 안에서 결제를 했으므로, 사용자가 카드회사를 속이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원심을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참여연대와 민변 등으로부터 “정확한 신용조사도 없이 길거리에서 카드 발급을 남발하며 몸집을 불렸던 카드회사의 책임까지 카드 사용자에게 전가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01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치지 않고 파업을 주도한 노조 간부에게 형법상 업무방해죄가 인정된다는 판례를 내놓았다. 조합원 총회를 거쳤고, 파업 참가 규모로 보아 조합원 과반수가 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법원은 “조합원의 찬반투표 절차 규정을 엄격하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위임에 의한 대리투표, 공개결의나 사후결의, 사실상의 찬성간주 등의 방법이 용인된다”는 절차적 이유를 들어 위법성을 인정했다.
기업 범죄에는 상대적으로 관대 대법원 3부(주심 고현철 대법관)는 2004년 6월, 참여연대가 “삼성전자가 전환사채를 싸게 발행해 이재용씨에게 넘긴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낸 전환사채 발행 무효청구소송에서 “신주발행의 무효는 신주를 발행한 날로부터 6개월 안에 소송을 낼 수 있다”는 상법 규정을 내세우며 참여연대가 항소 과정에서 낸 추가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1997년 3월 발행된 전환사채의 무효를 청구하는 소송을 같은해 6월 냈다. 참여연대는 삼성전자 등기이사들의 출입국 사실을 조회해본 결과, 이들의 과반수가 전환사채 발행 당시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실을 어렵게 확인한 뒤 1998년 4월 항소할 때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추가증거로 내놓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소송이 계속 중인데도 “전환사채 발행일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며 이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납득하기 힘든 판례를 내놓았다. 이런 논리라면 기업의 주식발행이 무효임을 입증하려면 항소심이든, 상고심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6개월 안에 입증자료를 모두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가 되고 만다. 여전한 보안법 알레르기 대법원 1부(주심 이용우 대법관)는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한창이던 2004년 8월30일,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하면서 판결문을 통해 강경한 보수색채를 드러냈다. 재판부는 “북한은 50년 전 적화통일을 위해 불의의 무력남침을 감행함으로써 민족적 재앙을 일으켰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발과 위협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북한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시도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런 사정이라면 스스로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가져오는 조치에는 여간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의 안보에는 한 치의 허술함이나 안이한 판단을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혀 형사법 해석의 엄격성 대신 보수편향의 안보철학을 선택했다. 이 판결보다 나흘 앞서 헌법재판소는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게시한 글을 통해 북한의 사상을 ‘찬양·고무’하고 〈공산당선언〉 등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대학생 2명이 낸 국가보안법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냈다. 국가보안법에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히며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개폐 논의가 있었던 이 조항들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 재판관 9인은 “합리적·합법적으로 해석된다면 개념의 불명확성은 제거될 수 있다”며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외면 2004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20대 남성의 상고심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의 존엄과 가치도 보장될 수 없으므로,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제한된다 하더라도 이는 헌법상 허용된 정당한 제한으로 봐야 한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할 때는 양심의 자유가 좀더 존중되고 보장돼야 한다”는 소수의견은 1명(이강국 대법관)에 불과했다. 우리와 비슷한 안보 환경에 있는 대만의 대체복무제가 소개되면서 전향적 판결이 기대됐으나 대법원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다만 대법관 5명(유지담 윤재식 배기원 김용담 조무제)이 보충의견을 통해 대체복무제 도입 필요성을 언급한 데 만족해야 했다. 헌법재판소도 한달 뒤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을 합헌으로 결정했다. 소수의견을 낸 김경일·전효숙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류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결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이들의 병역거부를 군복무의 고역을 피하기 위한 것이거나 국가공동체에 대한 기본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무임승차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머지 재판관들은 “양심의 자유는 단지 국가에 대해 개인의 양심을 고려하고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권리일 뿐, 양심상의 이유로 법적 의무의 이행을 거부하거나 법적 의무를 대신하는 대체의무의 제공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며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양심’을 격하했다. 새만금 보호에 무관심 지난 3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새만금 소송에서 11 대 2의 압도적 표차로 공사 재개를 명령했다. 11명의 대법관은 “사업을 중단할 정도로 농지의 필요성, 경제성, 수질관리, 해양환경 등에 중대한 사정변경이나 공익상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김영란·박시환 대법관만이 △담수호 목표 수질이 달성되지 못했을 경우에 예상되는 환경 재앙 △갯벌의 중요성 △철새 보호와 같은 국제적인 환경보호의 가치 △새만금 사업 실패 때의 국고손실 △사업을 취소하더라도 현재까지 완성된 방조제를 활용하는 대안이 열려 있는 점 등을 들어 “자연환경 보전의 가치가 개발에 따른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돼야한다”는 소수의견을 내놓았다. 이규홍·이강국·김황식·김지형 대법관은 보충의견으로 “수질문제가 해양환경상의 영향으로 새만금 사업을 계속 시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정도의 사정변경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도 “이번 사건은 새만금 사업을 취소해야 할 공익상의 필요가 생겼는지 여부, 즉 행정처분의 무효 또는 취소 사유가 있는지를 법적인 관점에서 평가·판단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환경소송은 미래에 닥칠 위험을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고 쪽의 입증책임이 완화돼야 할 필요가 있다”며 “대법원이 환경보전의 공익가치를 아직은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과거보다는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민주화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맞춘 것이지 최고 법관들의 소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기업 범죄에는 상대적으로 관대 대법원 3부(주심 고현철 대법관)는 2004년 6월, 참여연대가 “삼성전자가 전환사채를 싸게 발행해 이재용씨에게 넘긴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낸 전환사채 발행 무효청구소송에서 “신주발행의 무효는 신주를 발행한 날로부터 6개월 안에 소송을 낼 수 있다”는 상법 규정을 내세우며 참여연대가 항소 과정에서 낸 추가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1997년 3월 발행된 전환사채의 무효를 청구하는 소송을 같은해 6월 냈다. 참여연대는 삼성전자 등기이사들의 출입국 사실을 조회해본 결과, 이들의 과반수가 전환사채 발행 당시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실을 어렵게 확인한 뒤 1998년 4월 항소할 때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추가증거로 내놓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소송이 계속 중인데도 “전환사채 발행일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며 이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납득하기 힘든 판례를 내놓았다. 이런 논리라면 기업의 주식발행이 무효임을 입증하려면 항소심이든, 상고심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6개월 안에 입증자료를 모두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가 되고 만다. 여전한 보안법 알레르기 대법원 1부(주심 이용우 대법관)는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한창이던 2004년 8월30일,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하면서 판결문을 통해 강경한 보수색채를 드러냈다. 재판부는 “북한은 50년 전 적화통일을 위해 불의의 무력남침을 감행함으로써 민족적 재앙을 일으켰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발과 위협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북한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시도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런 사정이라면 스스로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가져오는 조치에는 여간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의 안보에는 한 치의 허술함이나 안이한 판단을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혀 형사법 해석의 엄격성 대신 보수편향의 안보철학을 선택했다. 이 판결보다 나흘 앞서 헌법재판소는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게시한 글을 통해 북한의 사상을 ‘찬양·고무’하고 〈공산당선언〉 등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대학생 2명이 낸 국가보안법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냈다. 국가보안법에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히며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개폐 논의가 있었던 이 조항들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 재판관 9인은 “합리적·합법적으로 해석된다면 개념의 불명확성은 제거될 수 있다”며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외면 2004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20대 남성의 상고심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의 존엄과 가치도 보장될 수 없으므로,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제한된다 하더라도 이는 헌법상 허용된 정당한 제한으로 봐야 한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할 때는 양심의 자유가 좀더 존중되고 보장돼야 한다”는 소수의견은 1명(이강국 대법관)에 불과했다. 우리와 비슷한 안보 환경에 있는 대만의 대체복무제가 소개되면서 전향적 판결이 기대됐으나 대법원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다만 대법관 5명(유지담 윤재식 배기원 김용담 조무제)이 보충의견을 통해 대체복무제 도입 필요성을 언급한 데 만족해야 했다. 헌법재판소도 한달 뒤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을 합헌으로 결정했다. 소수의견을 낸 김경일·전효숙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류의 평화적 공존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결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이들의 병역거부를 군복무의 고역을 피하기 위한 것이거나 국가공동체에 대한 기본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무임승차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머지 재판관들은 “양심의 자유는 단지 국가에 대해 개인의 양심을 고려하고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권리일 뿐, 양심상의 이유로 법적 의무의 이행을 거부하거나 법적 의무를 대신하는 대체의무의 제공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며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양심’을 격하했다. 새만금 보호에 무관심 지난 3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새만금 소송에서 11 대 2의 압도적 표차로 공사 재개를 명령했다. 11명의 대법관은 “사업을 중단할 정도로 농지의 필요성, 경제성, 수질관리, 해양환경 등에 중대한 사정변경이나 공익상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김영란·박시환 대법관만이 △담수호 목표 수질이 달성되지 못했을 경우에 예상되는 환경 재앙 △갯벌의 중요성 △철새 보호와 같은 국제적인 환경보호의 가치 △새만금 사업 실패 때의 국고손실 △사업을 취소하더라도 현재까지 완성된 방조제를 활용하는 대안이 열려 있는 점 등을 들어 “자연환경 보전의 가치가 개발에 따른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돼야한다”는 소수의견을 내놓았다. 이규홍·이강국·김황식·김지형 대법관은 보충의견으로 “수질문제가 해양환경상의 영향으로 새만금 사업을 계속 시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정도의 사정변경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도 “이번 사건은 새만금 사업을 취소해야 할 공익상의 필요가 생겼는지 여부, 즉 행정처분의 무효 또는 취소 사유가 있는지를 법적인 관점에서 평가·판단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환경소송은 미래에 닥칠 위험을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고 쪽의 입증책임이 완화돼야 할 필요가 있다”며 “대법원이 환경보전의 공익가치를 아직은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과거보다는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민주화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맞춘 것이지 최고 법관들의 소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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