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안심리전 기각율 한 자릿수…“문전박대는 없어”
1990년이후 31명중 29명 개업…미·일은 개업 안해
삼성·현대차 등 ‘돈되는’ 재벌비리사건 단골 도맡아
1990년이후 31명중 29명 개업…미·일은 개업 안해
삼성·현대차 등 ‘돈되는’ 재벌비리사건 단골 도맡아
주로 대법원 사건 수임…‘전관예우’논란 선봉
우리나라 대법관들은 퇴임 후 대부분 변호사 개업을 할 뿐만 아니라 주로 대법원 사건을 수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들이 수임한 사건은 대법원 본안 심리 전에 기각되는 ‘심리 불속행’ 기각률이 다른 사건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전관예우’ 논란의 정점에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거액의 수임료가 오가는 재벌 비리 사건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등 이들의 처신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퇴임 대법관의 변호사 변신은 무죄? =1990년 이후 퇴임한 대법관 31명 가운데 29명은 변호사로 개업해 활동하고 있다.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조무제, 배기원 대법관 등 2명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대학 강단을 선택했다. 변호사로 개업한 전직 대법관 가운데 법무법인에 소속된 사람은 14명으로, 김앤장·광장·세종·화우·율촌 등 국내 굴지의 큰 법무법인 소속이 많았다.
이들이 대부분 대법원 사건을 수임하고 있다는 점이 논란거리다. 인터넷 법률포털 <로마켓>의 도움을 받아 이용훈 대법원장과 윤영철 헌법재판소장, 최종영 전 대법원장, 그리고 2005년 7월 퇴임한 대법관 5명 등 모두 8명의 수임 현황을 분석해 본 결과, 전체 수임건수 1877건 가운데 대법원 사건은 1245건(66.3%)이나 됐다.
대법관 퇴임 뒤 대법원장으로 임명되기까지 5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한 이용훈 대법원장은 335건의 대법원 사건을 수임해, 하급심 사건(114건)의 세 배 수준이었다. 대법관을 지낸 윤영철 헌법재판소장도 변호사로 일하면서 하급심 사건(89건)의 두 배 가까운 141건을 맡았다. 8명 가운데 서성 전 대법관만 하급심 사건이 더 많았다.
장영수 고려대 법대 교수는 “이런 현상은 ‘대법관 출신도 전관예우에 기대어 대법원 사건을 맡는데 우리도 못할 게 뭐냐’는 식으로 다른 전관 변호사들의 무분별한 사건 수임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법관이 종신직인 미국이나 73살이 정년인 일본의 경우 퇴임 후에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 것이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경이적인 심리불속행 기각률=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심리 불속행 기각률이 다른 사건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 불속행이란, 형사사건을 제외한 민사·가사·특허 사건의 원심판결이 상고심을 제기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대법원이 본안 심리 이전에 상고를 기각할 수 있도록 한 처분이다.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의 40% 정도가 이러한 심리 불속행 기각으로 걸러지고 있지만, <한겨레> 분석 결과,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대부분 한자릿수의 낮은 심리 불속행 기각률을 기록했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을 두고 ‘전관예우’ 논란이 일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대법원장은 변호사 생활 5년 동안 민사·특허·가사 사건 236건을 수임하면서 단 7건만 심리 불속행에 걸려, 2.9%의 기각률을 기록했다. 송진훈 전 대법관과 윤영철 헌재소장의 기각률이 각각 5%, 5.7%를 기록하는 등 분석 대상이 된 대법관 출신 변호사 8명의 심리 불속행 기각률은 평균 6%에 그쳤다. “퇴임 대법관에게 상고 사건을 맡기면 최소한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는다”는 변호사 업계의 속설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서울 지역 법원의 한 판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상고 이유서를 쓰면 심리 불속행할 것도 본안으로 올려 판결이유는 써주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고 말했다. 하급심 사건도 마찬가지다. 서울고법의 한 중견 판사는 “잘 아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가지고 왔는데, 준비서면 기일을 하루만 더 달라고 해서, 재판을 하루 더 연 적이 있었다”며 “판결에는 영향이 없어도 재판 절차상으로는 어느 정도 편의가 제공된다”고 털어놓았다. 퇴임 대법관 수임 사건에 치이는 일반 사건들=퇴임 대법관의 대법원 사건 수임이 일반적인 사건의 충실한 심리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경험이 있는 또다른 판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수임한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한 번 더 검토하게 되는 등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며 “그 결과 개명신청 허가나 약식명령 사건 등 일반 국민들에게 더 절실한 사건에 대해서는 ‘1·2심에서 정확히 했겠지’ 하며 소홀히 취급하는 경우도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대법관 1명이 처리해야 하는 상고심 사건이 150여건에 이르러 쫓기듯이 사건을 처리하는 상황에서 퇴임 대법관이 수임한 사건이 아무래도 ‘우대’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돈 되는’ 사건에는 어김없이 등장=퇴임 대법관들은 최근 ‘돈 되는’ 재벌 비리 사건의 변호인으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4월, 정몽구 회장이 구속 기소되자마자 정귀호·이임수 전 대법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러나 “보석으로 풀려나기 위한 맞춤형 변호인단 구성”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받게 되자, 김앤장 소속의 이 전 대법관은 사임계를 낸 상태다. 집행유예 판결로 이용훈 대법원장의 호된 질타가 뒤따랐던 두산그룹 비리 사건에서는 퇴임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윤재식 전 대법관이 1심 때부터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이용훈 대법원장도 변호사 시절, 삼성의 변칙적 경영권 승계 논란을 빚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의 1심 변론을 맡기도 했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 퇴임 뒤인 1999년 8월 재산 국외도피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항소심을 맡아 보석을 신청했다. 그는 그로부터 한달 뒤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대부분의 대법관들은 30년 가까운 판사생활 동안 국민 세금으로 생활하면서 최고법관의 명예를 얻으신 분들”이라며 “명예와 부를 동시에 거머쥐려는 것은 국민을 실망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태규 고나무 기자 dokbul@hani.co.kr
공익활동위한 별도 ‘예우’ 필요
임명과정서 개업포기 유도 판례연구 등 활용안 고민을
법원도 퇴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이 부적절하다는 인식에 공감하며 ‘예우’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변호사 개업을 포기하는 ‘기회비용’과 품위 유지 문제를 감안하면 연금 이외에 별도의 예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법관이 퇴임 뒤 받는 연금은 올해 기준으로 360만원 안팎이다. 이는 지난해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4인 기준) 353만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지난 1월 대법원 청원으로 전직 대법원장 예우를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여기에는 대법원장의 자문기구로 둘 수 있는 사법정책자문위원회에 전직 대법원장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뒤, 대법원장 재직 시절 급여의 95%와 사무실·차량을 지원하되, 영리활동을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 문제와 특혜 논란 등으로 입법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병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사회 갈등을 조정하는 최고 법관이었다는 특수성 등을 감안해 입법이 긍정적으로 검토되길 바란다”며 “일단은 대법원장 예우에서 시작했지만, 퇴임 대법관에게도 적절한 공익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순한 예우가 아니라, 퇴임 대법관들이 법률적 경륜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국민의 세금으로 키운 대법관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판사는 “종신직 대법관 가운데 퇴임 희망자에게 판례를 연구하게 하는 영국의 제도를 참고할 수 있다”며 “퇴임 대법관들을, 지방법원보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고등법원의 조정위원들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대법관이 종신직인 미국이나 73살이 정년인 일본의 경우 퇴임 후에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 것이 확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경이적인 심리불속행 기각률=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심리 불속행 기각률이 다른 사건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 불속행이란, 형사사건을 제외한 민사·가사·특허 사건의 원심판결이 상고심을 제기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대법원이 본안 심리 이전에 상고를 기각할 수 있도록 한 처분이다.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의 40% 정도가 이러한 심리 불속행 기각으로 걸러지고 있지만, <한겨레> 분석 결과,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대부분 한자릿수의 낮은 심리 불속행 기각률을 기록했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을 두고 ‘전관예우’ 논란이 일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대법원장은 변호사 생활 5년 동안 민사·특허·가사 사건 236건을 수임하면서 단 7건만 심리 불속행에 걸려, 2.9%의 기각률을 기록했다. 송진훈 전 대법관과 윤영철 헌재소장의 기각률이 각각 5%, 5.7%를 기록하는 등 분석 대상이 된 대법관 출신 변호사 8명의 심리 불속행 기각률은 평균 6%에 그쳤다. “퇴임 대법관에게 상고 사건을 맡기면 최소한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는다”는 변호사 업계의 속설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서울 지역 법원의 한 판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상고 이유서를 쓰면 심리 불속행할 것도 본안으로 올려 판결이유는 써주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고 말했다. 하급심 사건도 마찬가지다. 서울고법의 한 중견 판사는 “잘 아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가지고 왔는데, 준비서면 기일을 하루만 더 달라고 해서, 재판을 하루 더 연 적이 있었다”며 “판결에는 영향이 없어도 재판 절차상으로는 어느 정도 편의가 제공된다”고 털어놓았다. 퇴임 대법관 수임 사건에 치이는 일반 사건들=퇴임 대법관의 대법원 사건 수임이 일반적인 사건의 충실한 심리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경험이 있는 또다른 판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수임한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한 번 더 검토하게 되는 등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며 “그 결과 개명신청 허가나 약식명령 사건 등 일반 국민들에게 더 절실한 사건에 대해서는 ‘1·2심에서 정확히 했겠지’ 하며 소홀히 취급하는 경우도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대법관 1명이 처리해야 하는 상고심 사건이 150여건에 이르러 쫓기듯이 사건을 처리하는 상황에서 퇴임 대법관이 수임한 사건이 아무래도 ‘우대’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돈 되는’ 사건에는 어김없이 등장=퇴임 대법관들은 최근 ‘돈 되는’ 재벌 비리 사건의 변호인으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4월, 정몽구 회장이 구속 기소되자마자 정귀호·이임수 전 대법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러나 “보석으로 풀려나기 위한 맞춤형 변호인단 구성”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받게 되자, 김앤장 소속의 이 전 대법관은 사임계를 낸 상태다. 집행유예 판결로 이용훈 대법원장의 호된 질타가 뒤따랐던 두산그룹 비리 사건에서는 퇴임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윤재식 전 대법관이 1심 때부터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이용훈 대법원장도 변호사 시절, 삼성의 변칙적 경영권 승계 논란을 빚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의 1심 변론을 맡기도 했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 퇴임 뒤인 1999년 8월 재산 국외도피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항소심을 맡아 보석을 신청했다. 그는 그로부터 한달 뒤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대부분의 대법관들은 30년 가까운 판사생활 동안 국민 세금으로 생활하면서 최고법관의 명예를 얻으신 분들”이라며 “명예와 부를 동시에 거머쥐려는 것은 국민을 실망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태규 고나무 기자 dokbul@hani.co.kr
공익활동위한 별도 ‘예우’ 필요
임명과정서 개업포기 유도 판례연구 등 활용안 고민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 오른손에는 저울을, 왼손에는 법전을 든 법의 여신상이 대법정을 지키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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