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숭례문광장·오페라하우스로 본 서울시 문화정책
이명박 서울시장 머릿속에는 ‘문화도시 서울’의 밑그림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옛 사람의 희미한 추억 속에서 지줄대던 청계천에 맑은 물을 다시 흘리고, ‘매장 문화재’가 된 지 오래인 돌다리들에 햇볕을 쬐겠다는 구상은 시장 선거당시 공약이었다. 시장이 된 뒤로는 시청 앞 광장에서 자동차를 내몰고 잔디밭을 일구었고, 도심 마천루 사이에서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외국영화의 한 장면을 그 잔디밭 귀퉁이에 재현하기도 했다.
이젠 도심 속 섬이었던 국보 제1호 숭례문 앞에 광장을 조성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한강 위의 버려진 섬 노들섬(중지도)에는 세계적인 오페라하우스를 세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시장의 문화도시 구상이 하나씩 구체화할 때마다, 누구보다 이를 반길 법한 문화운동단체들은 어김없이 반기를 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왜일까? 문화운동단체들은 ‘이명박 반대운동단체’인가, 아니면 이명박 시장의 구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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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6월 서울시청 앞에서 청계천의 바른 복원을 촉구하는 문화단체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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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운동단체들, 이명박 ‘문화도시 구상’에 사사건건 반대…왜?
이 시장 취임 두 돌이 되던 지난해 여름, 문화운동단체들은 이 시장을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개발주의자’로, ‘에코 파시스트’라고 이름붙였다. 친환경, 친문화적 상징을 개발주의에 끌어들인 뒤 이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행정 스타일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일 추진에 ‘남는 장사’ 여부가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도 이런 이름이 붙게 된 요인이다.
이 시장의 행정 스타일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시장의 문화도시 밑그림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들 문화단체의 비판이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설득력이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이 시장 탓이다. 이 시장은 어떤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독단적 행정 스타일을 다시금 과시한다. 시청광장 안 스케이트장 계획이 논란을 일으켰을 때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이를 강행한 뒤, 스케이트장에 밀려든 시민들을 바라보며 팔짱 낀 채 “봐라. 시민들이 얼마나 좋아하느냐”고 한마디 하곤 그만이었다.
“집회 못하게 나무 심어 숭례문 보호” 발상의 이율배반
서울시가 최근 발표한 숭례문 앞 광장 조성 계획과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 계획도 ‘이명박 식 문화행정’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그동안 차로에 둘러싸여 보행자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숭례문의 한 쪽을 2500평짜리 광장으로 만들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은 행정가의 한 차원 높은 문화재 의식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도 액면 그대로는 없다. 서울시는 오는 9월 완공할 이 광장에 키 3∼5m짜리 조경수를 심을 계획이다. 이곳에서 집회를 못 열게 하려는 것인데, 국보 1호 문화재를 집회군중으로부터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는 게 시의 설명이다.
문화 관련 전문가들의 쓴웃음도 어김이 없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숭례문 앞에 나무를 심는 건 무엇보다 문화재 원형에 맞지 않는다”며 “숭례문뿐 아니라 4대문 주변 어디에도 조경수를 심은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숭례문에 위협이 되는 것은 자동차와 매연
4대문 주변 어디에도 조경수 심은 전례 없어…원형 복원과 반대방향”
황 위원장은 “정작 숭례문에 위협이 되는 건 집회 참가자가 아니라 숭례문 옆을 질주하는 자동차와 매연”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그동안 숭례문 부근 도로의 가로수를 제거해 보행자들의 조망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요구였는데, 숭례문에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게 한다면서 그 둘레에 나무를 심는 건 오히려 정반대로 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경수 식재 계획은 성곽 문과 광장의 본래 의미나 기능과도 맞지 않는다. 황 위원장은 “숭례문은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누구나 드나들고 소통하는 곳이었고, 소통의 현대적 의미는 다름 아닌 광장에서의 집회”라며 “숭례문을 보호하려면 더 많은 관리인력을 배치할 일이지 문화재의 원형과 시대상황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거스르는 행위를 해서야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류재홍 문화연대 부위원장은 “시청 앞 광장이라고 해놓고 우리 기후와 풍토에 안 맞는 잔디를 심어 하이힐 신은 사람은 들어갈 수도 없게 하더니 이번엔 관상수냐”며 “광장 안의 활동을 촉발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지는 못 할망정 활동을 규제하려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문화유산 접근성 높이고 감수성 길러주는 게 보호의 근본대책”
관상수를 심어 집회를 막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강임산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종묘 앞 집회를 막으려고 화단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었지만 집회는 집회대로 막지 못하고 노숙인 잠자리와 어르신들의 술자리로 변해버리지 않았느냐”며 “그런 식으로 종묘의 신성성을 지킨다면서 그 앞에 상업용 대형 지하주차시설을 개발해 어정(임금의 샘물) 수맥까지 끊어놓는 이율배반적이고 근시안적인 문화행정을 되풀이해선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 전문위원은 “성숙한 국민의식이 형성되도록 해야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방식으로 문화재를 보호하겠다는 발상은 또 다른 실패를 예고한다”고 말했다. 또, “문화재를 보호하려면 국민의 문화유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감수성을 길러주는 게 훨씬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숭례문의 본래 의미와 기능이 살아나도록 집회를 허용한다면 문화재의 물리적 복원뿐 아니라 심리적 복원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소수 위한 대규모시설보다 다양한 소규모 시설 필요”
서울시가 지난 15일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 계획도 문화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문화연대는 최근 성명을 내어 “오페라하우스는 시민 모두가 이용 가능한 시설이라기보다는 소수만을 위한 것”이라며 “경제적 격차뿐 아니라 문화적 격차도 강화되는 현실에서 소수만 향유할 수 있는 예술단지를 건립하는 건 시민 삶의 질 향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문화연대는 “서울에는 문화시설이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지금 필요한 건 오페라하우스 같은 대규모 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창의성과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중소형 시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는 2009년 완공 목표인 오페라하우스의 착공시기가 이 시장 임기 안이라면, 이 시장은 여지껏 그랬듯이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강행할 것이다. 이 시장의 이런 질주에는 시민들의 지지도 한몫 거들고 있다. 문화관광부 산하 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김규원 연구원은 “시청 앞 광장이나 스케이트장 사례에서 보듯이 문화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시장이 만들어놓은 것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어쨌든 좋게 나타나고 있다”며 “서울시가 완성해놓은 사업계획의 타당성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절차적 타당성을 먼저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1차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같다고 해도 과정이 잘못됐으면 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스페인 빌바오가 세계적인 문화도시가 된 건 그 도시 안에 ‘구겐하임 미술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미술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프랑코 시절 바스크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활발한 문화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또, 영국 리버풀이 영국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된 것도 ‘테이트 미술관’이 생겨서가 아니라 대안예술가들의 꾸준한 활동과, 이 미술관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민들의 토론, 이를 통한 문화 소비 등이 어우러져 나왔다고 했다.
“빌바오가 문화도시된 것은 구겐하임미술관 때문이 아니다”
“시민사회와 함께 토론과 협의를 충분히 거쳤는데도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어야 한다는 똑같은 결론이 나올 수는 있다.”김 연구원은 “그러나 의견수렴의 과정과 절차가 생략된 채 밀어붙이기 식으로 문화 행정을 펼치면 대학로와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에서 보듯 시민의 지속적인 문화 향유를 이끌어내지 못 한다”며 “이 시장이 문화도시를 만들겠다며 박정희 시대의 ‘토건국가’ 건설 방식을 고집한다면 아무리 많은 문화사업을 벌이더라도 서울은 문화도시가 아니라 토목도시이고 건설도시일 뿐”이라고 말했다.
류재홍 문화연대 부위원장은 “이 시장은 서울의 역사성을 복원한다고 하면서 독단적인 전시행정에 매달리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기껏 많은 세금을 들여 문화유산을 복원한다는 게 역사성은 역사성대로 떨어지고 공공성도 잃고 마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들의 1차적 반응이 이 시장의 대권가도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시청 앞 광장과 숭례문, 오페라하우스가 시민 품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서울시는 이제 시청 앞 광장의 정치집회를 금지하는 단계를 넘어 이곳을 시 청사 ‘부설광장’으로 변경하려고 하고 있다. 문화도시의 이름 아래, 6·10항쟁과 2002월드컵을 거치며 시민의 손에 의해 민주화와 축제의 광장으로 자리잡은 이곳에서 자동차뿐 아니라 시민도 내몰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