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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5대째 이어온 ‘왕의 남자’랍니다

등록 2006-07-12 19:27

폐주의 묘 왜 지켜왔는지 몰라도
운명인양 재실안에서 태어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가족의 힘으로 지켜” 자부심
연산군 묘 지키는 ‘21세기 능참봉’ 홍문옥씨

“한겨울밤에도 아버지는 수상한 소리가 나면 맨발로 뛰어나가 묘역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이유를 모른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왜 폐주의 묘를 지켜왔는지….

철마다 잡풀을 뽑고 낡은 재실을 수리하며 5대를 이어 연산군 묘를 지켜온 또 한사람의 ‘왕의 남자’가 우리 곁에서 ‘소박하지만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

‘21세기 능참봉’홍문옥(58) 씨는 능지기의 ‘운명’인 양 묘역 재실 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영화 ‘왕의 남자’가 일으킨 ‘흥행 후폭풍’ 덕에 지난 11일부터 이곳이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홍씨는 한층 손놀림이 바빠졌다. 힘은 더 들어도 왠지 마음은 즐겁다.

어떤 인연으로 연산군 묘를 ‘다섯 남자’가 대를 이어 지켜오고 있는냐는 질문에 홍씨는 “나도 그 뿌리를 정확히 모른다”며 잠시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려서 건강이 안 좋아 아버지 때를 빼고는 기억이 없는데다, 가족사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역은 지난 91년 사적(362호)으로 지정됐다. 국가가 뒤늦게 ‘관리’에 나서기 전에는 오롯이 홍씨 부자가 이곳을 보살펴온 셈이다. 봉급도 없이 철마다 풀을 뽑고 장마철에는 비석 틈도 메우며 묘역을 애지중지 아껴왔다. 홍씨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활동한 ‘마지막 능참봉’이기도 하다. 관원출입증도 지니고 있었고 한달에 쌀 3가마니를 월급으로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들 가족은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느 왕릉과 달리 폐위돼 ‘폭군’으로 낙인 찍힌 이곳을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씨는 “목수일과 농사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만큼 집안이 어려웠다”며 “그렇지만 한겨울밤에도 수상한 소리가 나면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순찰을 돌았다”고 말했다. 가세가 기울어 홍씨는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했지만 수십년을 돈 한푼 바라지 않고 이곳을 지켜낸 아버지를 요즘 들어 부쩍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홍씨는 아버지를 이어 79년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 일용직 직원으로 채용돼 본격적으로 묘역 관리에 나섰다. 6~70년대 문화재 도굴 사건이 잦아 국가에서도 관리자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홍씨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먼저 묘역을 휘 둘러보며 나뭇잎을 치우고 잡초를 뽑고 나면 오전이 훌쩍 가버린다”며 “오후에는 곳곳의 쓰레기를 치우며 담장을 일일이 손으로 쓸어보며 확인한다”고 일과를 소개했다. 외딴 곳에 자리한 묘역이지만 사람들이 무덤가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꽁초를 버리고 가는 때가 종종 있어 단 하루도 ‘순찰’을 거를 수 없다고 한다.


내년 6월 ‘정년퇴직’을 앞둔 홍씨. 그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재실에 요즘 들어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다. 어릴 적 마을 사랑방 노릇을 했던 때가 그리워서다. 보람도 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곳을 온 가족의 힘으로 지켜냈다는 소박한 자부심이 그것이다. 6~7년 전부터는 연산군의 후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4월 초순이면 묘역을 찾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말주변이 없다며 기자의 질문에 연신 손사래를 치던 홍씨는 “여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삭여왔던 가족사인데 툭 털어놓으니 후련하다”며 엷게 웃었다.

글·사진 전진식 기자, 장유영 인턴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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