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나 국회가 만든 여러 법령의 위헌성을 따지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대표적인 기능이다.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6명이 뜻을 모으면 국회나 정부가 만든 법령의 효력을 즉각 정지시킬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헌재의 판단은 아래 예에서 보듯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상의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판사가 “대법원이 기관총이면 헌법재판소는 박격포”라고 표현할 정도로 헌재 결정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러나 헌재의 긍정적 구실 못지 않게, 그동안 소수자 인권이나 사상·양심의 자유 등의 기본권 보호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오는 8~9월 5명의 재판관 교체를 앞두고 엘리트 판검사 출신이 독점해온 헌재의 구성에 다양성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헌법 재판관 30명 가운데 21명이 고위법관(고등부장 이상) 출신, 5명이 검찰간부(검사장급 이상) 출신이고, 나머지 4명이 변호사 출신이었으나 이들도 판·검사 경력자을 갖고 있었다.
■ 헌재가 바꾼 일상들
#1 과외 전면허용 ‘고액 스타강사’ 출현
직장인 강헌재(36·가명)씨는 오랜 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대기업을 다니다 2년 전에 논술강사로 변신한 문학원(35·가명)씨도 있다. 국문학 석사 출신인 문씨는 서울 강남 8학군 쪽으로 개인과외를 다니다가 알음알음 지명도를 높여 요즘은 ‘고액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문씨가 논술강사로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헌법재판소 덕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헌재는 지난 2000년 4월 학원 및 대학생 과외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과외를 금지시킨 법률 조항을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사회적 해악이 없는 교습행위까지 광범위하게 금지하는 것은 국민의 자녀교육권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과외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헌재의 결정이 없었다면 문씨의 오늘은 없을지도 모른다.
#2 청소년 당구장 출입 길 열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문득 한 친구가 돌발제안을 했다. “우리 술만 먹지 말고, 오랜만에 당구 한 게임 어때?”
이들은 모두 흔쾌히 당구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는 의외로 중고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 눈을 피해 몰래 출입해야 했던 강씨에게 이런 풍경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당구장은 청소년에게는 금단의 지역이었다. 문화체육부가 이곳을 청소년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93년 5월 헌재는 청소년의 당구장 출입을 금지한 문화체육부 규칙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문화체육부 장관이 시행규칙에 당구장에만 18살 미만자 출입금지 표시를 달도록 한 것은 당구장업자에게만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헌법상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게 헌재 결정 요지였다.
#3 숙취해소 음료 연구개발 물꼬 터
기분좋게 당구를 즐긴 강씨 일행은 생맥주로 ‘입가심’까지 마친 뒤 자정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접었다. 다음날 아침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있는 강씨는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숙취해소제 ‘숙취안녕’ 한병을 사서 들이켰다.
술고래들에게 반가운 숙취해소 음료가 개발된 것도 헌재 덕이 크다. 식품의약품안정청은 1998년 10월 제품 포장에 ‘음주전후’나 ‘숙취해소’라는 표시를 금지하는 고시를 만들었다. 음주 조장을 막고 “국민 건강을 보호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헌재는 2000년 3월 이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오히려 숙취해소의 기회를 박탈하고, 숙취해소용 식품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와 시도를 차단해 결과적으로 영업과 광고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헌재의 이 결정은 숙취해소 음료 연구·개발의 물꼬를 텄다.
■ 여전히 보수의 아성?
#1 ‘다수 기본권’ 치우쳐 약자 생존권 외면
지난 5월25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송인준)는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한 보건복지부 규칙을 재판관 7대1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는 1973년부터 법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아 안마사로 일해왔던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사건이었다.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은 고공시위를 벌이고 한강에 몸을 던지는 등 격렬하게 항의했다. 3명의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위헌 의견을 낸 7명의 재판관은 보건복지부 규칙이 ‘일반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시각장애인의 생계 보장 등 공익에 비해 비시각장애인들이 받게 되는 기본권 침해가 지나치게 커서 법익의 균형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김효종 재판관만 “시각장애인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이 정도 제한은 가능하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헌법적 기본권 사이의 충돌이었다. 다수의견은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15조)”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강조한 반면, 소수의견은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34조 5항)”는 ‘소수자 생존권’에 주목한 것이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는 “기본권이 충돌할 때, ‘생존권 우선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게 헌법학계의 정설”이라며 “헌법재판소는 비시각장애인의 직업선택의 자유에만 필요 이상의 눈길을 주었지, 장애인의 생존권 조항에는 애써 눈을 감아 버렸다”고 지적했다.
#2 국가안보 내세워 양심의 자유에 인색
2004년 8월 헌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해온 병역법 규정을 재판관 7대2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양심의 자유는 국가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며 “개인적 자유의 전제 조건인 국가안보를 해칠 수 있는 무리한 요구는 할 수 없다”고 밝히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하는 데 그쳤다.
김경일·전효숙 재판관만이 “병역거부자들이 반세기 동안 형사처벌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양심을 유지해 온 반면, 입법부는 이들의 입영을 강제하고 형사처벌을 하는 등 오랜 갈등을 해소할 최소한의 노력을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이 사건 법률조항은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3 보안법 폐지여론에도 전원일치 합헌
2004년 8월 헌재는 국가보안법 7조1항(찬양·고무죄) 및 5항(이적표현물 소지 등)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했다.
이 조항은 한나라당에서조차 폐지 의견이 나올 정도로 보안법 최대의 독소조항으로 지목돼온 터여서 헌재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