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돌려달라” 백성이 순종 상대 소송도
대법, 일제초 민사판결록 편찬
1910년대 초 우리나라 최고법원의 판결문을 모아놓은 〈조선고등법원 판결록〉 2권 민사편이 18일 공개됐다. 법원도서관이 펴낸 이 책에는 1912년~191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지금의 대법원) 판결문 112건이 들어있다. 친일파 이완용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연루된 소송 등 ‘유명인’의 송사도 수록돼 있으며, 부첩 관계나 여성의 재혼으로 인한 법률적 효력 등과 관련한 판결을 통해서는 당시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1913년 3월 14일 조선고등법원은 일본인과 분쟁에 휘말려 79만여평의 땅을 잃게 된 이완용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일본인 구보타는 1911년 전북 부안군 일도면 등지에 있는 이완용 소유의 땅 3954 마지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경성지방법원에 토지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을 냈고, 1심인 경성지방법원과 2심인 경성복심법원 모두 원고 승소 판결해,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토지 소유권의 확인을 구하는 소송은 부동산에 관한 소송이므로 원고는 처음부터 소송을 관할인 공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 냈어야한다”며 1·2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1910년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긴 ‘경술국치’를 주도한 뒤 일본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오른 이완용의 위세를 짐작케하는 판결이다.
1910년대 초반 정아무개씨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명성황후의 묘지인 홍릉의 경계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땅이 편입됐으므로 이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1914년 고등법원은 “능원묘(왕실의 무덤)의 내해자(안쪽 경계)에 편입된 토지는 당연히 왕실의 소유로 귀속된다”며 정씨의 상고를 기각해 옛 왕실의 위신을 세워줬다. 그러나 판결문에 순종의 이름이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돼 나라를 잃은 초라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밖에 부첩 관계는 당사자 일방의 의사로써 언제든지 자유롭게 해소할 수 있어서 굳이 재판상 이이(이별)의 청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결한 것이나, 어머니가 재혼하면 그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했던 관습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 등도 눈에 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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