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전문가들의 분석 “한승조 망언은 왜 폭발했나”
“‘벌거숭이 임금님’ 이야기 같다.”
한승조 고려대 ‘전’ 명예교수의 일본 <정론>지 기고문 파문을 두고,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한 낯익은 ‘우화’를 떠올렸다고 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차는 근엄했다. 달라진 건 임금님 옷차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임금님은 벌거숭이였고, 고관대작 신하건 장삼이사 백성이건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다만 누군가 그 옷차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임금님 행차길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승조씨는 지난 4일 기고문 내용이 보도된 뒤 사흘 사이에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와 고려대 명예교수 직함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파문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게 번졌다. 그는 문제의 글이 이처럼 엄청난 사태를 부를 것을 알고 썼을까 모르고 썼을까. 이 물음은 한 교수 자신만이 대답할 수 있지만, 임금님의 벌거벗은 사실을 새삼 알았다는 듯 그의 글에 반응하는 사회여론은 확실이 우화를 닮았다. 강 교수는 “우리는 그의 주장이 낯선 것처럼 느끼지만 그들 세계에선 결코 낯선 게 아니다”고 말했다.
“새삼 놀라지만 한승조씨 주장은 사실 결코 낯선 게 아니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 작가 복거일씨 등이 제기한 ’식민지근대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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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위안부 피해 여성을 미군 기지촌 성매매와 관련지어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던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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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장은 이미 ‘식민지근대화론’ 의 이름으로, 소수이긴 하나 일부 학자와 지식인들의 입과 글로써 꾸준히 제기돼왔다. 지난해 방송 토론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미군 기지촌의 매매춘과 연결해 발언한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나, 친일의 불가피성과 일제침략의 필연성을 내세운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저자 복거일씨(소설가)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논거 자체만 놓고 보면 한 교수의 것이나 이들 두 사람의 것이나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앞서 두 사람의 학문적 견해 표명과 한씨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이 사뭇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아무리 일제 강점기를 옹호하는 주장이더라도 그것이 학자의 연구결과에 의한 학문적 견해 표명이라면 사회가 과민반응을 보이며 비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면서도 “문제의 글은 학문적 견해 표명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정치적인 의도를 짐작케 하거나 의심하게 하는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도정일 교수 “문제의 글은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견해가 각각 절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며,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축복해야 하며, 일본인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언론 보도의 인용 부분을 보거나 네티즌의 반응을 보더라도, 여론의 공분을 자아내는 가장 결정적인 표현은 바로 이 대목이다. 해방 이후 일제 강점기를 이처럼 노골적인 표현으로 미화한 전례는 없다. 한씨가 학문적 태도의 형식마저 버리고 ‘찬양·고무’로까지 나아가는 바람에 엄청난 역풍을 만났다는 설명이다. 오죽하면 그가 공동대표로 있던 대표적 극우단체마저 등을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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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오전 한승조 공동대표에 대한 지도부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며 지도부 총사퇴를 촉구하고 있는 자유시민연대 비상대책위 회원들. 김정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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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소신따라 기고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길 바란다”
한씨는 파문이 커지는 도중에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평소 소신에 따라 기고했다”며 “오히려 이 문제가 공론화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씨가 이런 역풍을 예상하고도 문제의 글을 썼다면 그는 ‘순교자’가 된 셈이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뜻밖의 재난을 당한 ‘이재민’ 꼴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그가 하필 이 시기에 자신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또 왜 이 때 공론화를 기대했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그의 글은 절묘하게도 3·1절 직후 발표됐다.
김동춘 교수 “한씨의 글은 한씨 개인의 글이 아니다”
한씨의 글을 시대상황의 프리즘을 통해 읽어내려는 이들은 “한씨의 글은 한씨 개인의 글이 아니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그의 글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깔려 있는 것을 표현했을 뿐”이라며 “식민체제와, 그 연장선에 있는 분단체제를 거치며 기득권을 계속 쥐어온 세력들이 냉전체제가 느슨해지면서 느끼는 위기의식을 드러내거나 조직화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그가 친일 문제를 얘기하면서 색깔론을 들고나온 것도 이런 사정과 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강내희 교수 “극우세력의 적극적인 자기정당화 시도”
그러나 그의 글이 ‘위협구’인지, 아니면 ‘폭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강내희 교수는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파시즘적인 흐름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사회도 극우세력이 잇달아 세번 정권창출에 실패했지만 현실정권의 일부세력과 신자유주의적 이해를 공유하면서 뉴라이트운동 같은 방식으로 적극적인 자기정당화에 나서며 이런 흐름을 타고 있다”고 풀이했다. 의도적인 위협구로 보는 셈이다.
서중석 교수 “기득권 붕괴에서 나온 극우세력의 ’실신’”
이에 반해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는 “극우들이 차츰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져가고 위협받는 상황에서 실수를 한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각이 있어도 참으면서 정략적으로 얘기했는데, 어려운 상황이 오자 ‘실신’을 한 것 같다”며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탄핵을 하려다 역풍을 맞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서 교수는 “유럽이나 미국의 극우는 민족주의와 결합되는데, 제3세계의 극우는 제1세계 제국주의에 기대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도정일 교수는 “그들은 지금 정권을 좌파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자신들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과 공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런 공포가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강박과 만나 히스테리와 같은 극단적이고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행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도정일 “성숙한 우파가 우리 사회에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줘”
그는 “이들은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우파 민족주의자들마저 역사적으로 폐기처분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런 극단적인 행동이야 말로 성숙한 우파가 한국사회에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상대적으로 ‘폭투론’이 강세를 띄고 있는 가운데, 강내희 교수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강 교수는 “더는 정권 재창출의 희망이 없어보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고 패배주의적이고 논리적 근거도 없고 발언 효과에 대한 사회적 분석도 없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거칠게 내뱉은 것일 수도 있다”며 “‘벌거숭이 임금님’ 우화처럼 자기들끼리만 얘기하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온 건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김동춘 교수는 “한 교수는 전에는 극우반공주의 발언을 주로 해왔지 식민주의 문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며 “그런 한 교수가 극우반공주의 발언보다 훨씬 민감하고 거부감이 큰 반민족적 태도를 갑자기 드러내다 보니 같은 우파들도 당혹감을 드러내고 그와 선을 그으려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한씨가 굳이 국내 매체가 아닌 일본 극우매체에 글을 쓴 걸 두고도 속사정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도정일 교수는 “일본은 극우세력이 정치적 지배담론을 지배하는 시대이다 보니 그쪽의 힘을 등에 엎고 한국사회의 기류를 바꿔야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말했다. 강내희 교수는 “한국의 우파들은 한-미-일 동맹체제 안에서 지배적 이익을 얻어온 데다 전세계적으로 극우세력이 지배적 위치를 확보하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이 덩달아 나온 게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한정숙 교수 “외세의존적 극우세력이 극단적 방식으로 기득권의 이해 대변한 사례”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학)는 “이번 사태는 외세에 의존하며 독자성이 없는 극우세력이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사례”라며 “자율적인 주권공동체 형성이 빠진 제국주의 근대화는 주체를 말살하는 자기부정이며 모순일 뿐이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씨의 글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근대화의 덫에서 빠져나오기에는 그 방식이 너무 단말마적임을 보여준다는 ‘필화사건’일지도 모른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김순배 기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