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홍성엽(왼쪽에서 다섯번째)씨가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회원들과 함께 수련회를 가서 찍은 사진. 이해찬(홍씨 바로 오른쪽) 전 총리와 김부겸(왼쪽에서 두번째) 의원, 성유보 전 방송평가위원장(오른쪽에서 세번째), 문학평론가 김도연(맨 오른쪽·1993년 작고)씨의 모습도 보인다. 아래 원 사진은 홍씨가 생전에 쓴 일기.
70~80년대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자유를 억압받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깨알 같은 글씨로 생생하게 기록한 한 운동가의 일기가 발견돼 빛을 보게 됐다. 1979년 계엄 당시 결혼식으로 가장한 민주화 시위였던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서 신랑 구실을 맡았던, ‘민주주의와 결혼한 남자’ 고 홍성엽씨가 주인공이다.
홍씨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지인들은 8년 동안 백혈병과 싸우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홍씨의 유품을 정리하다 1977년부터 2005년까지 써내려간 일기를 발견했고, 성금(061-01-144003, 농협 김학민)을 모아 10월 말께 책으로 펴내기로 했다.
1979년 9월26일치 일기를 보면, 성산대교 공사를 위해 작은 가게를 강제로 철거하는 장면이 나온다. 발을 동동 구르던 집주인 아주머니는 식칼을 꺼내 자해를 시도하다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다섯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엄마, 엄마” 하며 울고만 있다. “집을 헐던 사나이들도 역시 같은 서민들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에 스스로도 긍지를 가질 수 없었다. 멋쩍고 무표정한 그들이었다.”
같은해 9월22일치 일기를 보면, ‘고난받은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연극 공연을 한 뒤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에 의해 참석자들이 연행되고 두들겨 맞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화순 목사도, 백기완 선생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도 무참히 구타를 당하며 연행됐다.
홍씨는 이날 일기 끝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렇게 폭력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몇배, 몇십배로 되돌려줄 것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이 울분과 분노와 슬픔이 잊혀질까 두렵다.” 그가 꼼꼼히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긴 이유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