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밀 판례 비교
‘야당 대선후보 동향 등 기밀여부’ 공방 예상
대법원 “일반인에 알려지지 않은것” 판례
대법원 “일반인에 알려지지 않은것” 판례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북한 공작원 접촉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장민호(44·구속)씨 등이 북한에 보고한 내용 등이 국가기밀인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가기밀 여부에 따라 간첩죄로 처벌될 수 있어 재판 과정에서도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국가기밀 여부=국정원은 장씨 등을 국가보안법 제8조(회합·통신 등) 위반으로 일단 구속한 뒤, 간첩 혐의에 대해 집중 수사하고 있다. 보안법 제4조(목적수행)의 간첩 혐의를 적용하려면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 또는 중개하거나 군사기밀을 누설한 사실을 밝혀야 한다. 검찰 관계자는 “북한에 전달한 내용 등을 자세히 살펴본 뒤 기밀 여부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보안법의 국가기밀을 폭넓게 해석해오다 1997년 기밀의 개념을 좁게 해석하는 쪽으로 판례를 바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돈희 대법관)는 다수 의견으로 “기밀은 국내에서의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 물건 또는 지식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내용이 누설되는 경우 국가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기밀로 보호할 실질 가치를 갖춘 것이어야 한다”고 밝히며,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비밀로서의 실질적 가치와 누설됐을 때의 위험성을 기밀 판단의 핵심 요인으로 본 것이다.
이 판례에 따르면 장씨 등이 북한에 보고했다는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시민단체 동향’이나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주요 사업내용 및 인물자료’, ‘야당 대선후보 동향’ 등이 기밀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보고 내용이 이미 남쪽에서 널리 알려진 내용의 수준이라면 대법원 판례에 견줘 볼 때 국가기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다.
법원은 국내 총선과 관련한 정당 및 재야단체들의 입장과 대통령 후보들의 성향, 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 등은 국가기밀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재야 인사들의 구체적 동향과 재야단체의 사업계획안 등은 기밀이 된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간첩 혐의로 기소된 정아무개씨 사건에서 한국인명사전과 언론사 연감 등에는 사회지도층 인사의 신상정보가 망라돼 있다는 점 등을 들어 기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장씨 등의 변호인은 “국내 정세나 민주노동당, 시민단체의 동향을 국가기밀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장씨가 89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뒤 국내에서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며 <신동아> <월간조선> <말> 등에서 한국 정세를 파악해 홍콩 사서함을 통해 북한에 보고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장씨의 수상한 행적=국정원에 따르면 장씨는 8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8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유력 국내일간지의 지사에서 기자로 일할 때 북한 공작원에 포섭됐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북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 김형성(60대)에게 의식화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1970·80년대 간첩 사건에 연루된 해외동포들이 대부분 유럽이나 일본에 사는 이들이었다는 점에 비춰보면, 북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심한 미국에서 장씨가 공작원에 포섭됐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볼 수 있다.
국정원은 장씨가 김씨의 권유로 동유럽을 통해 89년 처음 방북해 홍콩의 사서함을 통해 북한에 보고하는 방법, 주체사상 등을 교육받고 공작금 1만달러를 받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장씨가 미국 시민권을 얻은 때는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뒤인 1993년이다. 장씨가 유럽의 여러나라를 거쳐 89년 방북했을 때는 한국 국적이어서 한국 정보당국이 알아챘을 가능성도 있다. 국정원은 또 장씨가 93년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뒤 해마다 한두차례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대외연락부 공작원들과 접촉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황상철 고나무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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