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광화문 ‘그때 그 사람들’이 본 탄핵 1년과 한국의 오늘
2004년 3월12일 오전 11시56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은 ‘대통령 노무현 탄핵안’ 가결을 선포하면서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전진해야 한다”고도 했다.
역사적 상황 앞에서, 그의 말은 예언적으로 들렸다. 4·15 총선 결과는 탄핵을 이끈 정치세력들에게 ‘자업자득’의 교훈을 돌려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시민의 힘으로 한걸음 ‘전진’했다. 그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대상이나 주체가 정반대로 뒤집혔을 뿐. 그는 1년 뒤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자신이 역사의 ‘악역’이 아닌 ‘반영웅’임을 애써 강조하려는 것처럼 들린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의를 보고 거리로 나섰던 이들은 ‘다시 탄핵이 오면’이라는 가정 앞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 그 때 <한겨레> 지면에 등장했던 시민 세 사람에게 물었다.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촛불을 들겠다.” 그들의 대답은 박 전 의장의 말과 정확히 댓구를 이뤘다. 박 전 의장이 다시 의사봉을 잡으려거든, 이런 사정도 미리 알고 잡지 않으면 비싼 수업료 내고 배운 ‘자업자득’의 교훈도 쓸모없게 될 성싶다.
“다시 탄핵 와도 의사봉 잡겠다”는 이는 악역인가 반영웅인가
그러나 대통령 탄핵 1년을 맞은 광화문의 ‘그 때 그 사람들’은 마음이 썩 편해보이지 않았다. 대통령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탄핵 주도세력도 선거로 심판했지만, 지난 1년도, 또 현재도 마냥 기쁠 수만은 없다. 이들의 복잡한 심경은, 박 전 의장의 표현을 빌리면, ‘대한민국의 전진’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혜애 녹색연합 정책실장은 대통령 탄핵안이 결의된 날부터 ‘탄핵무효·부패정치청산을 위한 범국민행동’의 상황실장을 맡아 일했다. 범국민행동은 하루 최대 35만명이 모이기도 한 광화문 촛불집회를 이끌었던 시민사회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의 사상 최대 연대체였다. 시민사회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이 연대하는 일도 드물지만, 거의 대부분의 관련단체가 참여하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업무 복귀도, 열린우리당의 총선 대승도 범국민행동에 빚진 바 크다.
“요즘 노무현 정부 하는 걸 보면서 농담 삼아 ‘왜 그 때 그 고생을 했을까’ 말하곤 해요. 물론 정말로 후회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요. 시민사회가 그 당시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응한 건 틀림없거든요. 그만큼 시민사회가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반개혁의 선명한 대결구도가 탄핵을 매개로 정확히 그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요. 그런데 국민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워준 노무현 정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면 한숨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1년 뒤 대통령과 맞선 김혜애 실장 “탄핵집회는 시민운동에 귀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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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애 당시 범국민운동 상황실장(녹색연합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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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애 실장은 지난해 총선 뒤 다시 환경운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해 11월, ‘환경비상시국회의’라는 비상한 연대기구의 사무국장을 다시 맡을 수밖에 없었다. 천성산 관통 고속철도 문제를 비롯해 환경문제에 관한 한 노무현 정부에 더 기댈 게 없다고 판단한 환경운동단체들이 정부와 전면대결에 나선 것이다. 김 실장은 “정보과 형사들이 ‘3월엔 대통령 구하자고 나서더니 왜 11월엔 싸우자고 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더라 ”며 씁쓸해했다.
그러나 김 실장에게도 지난해 탄핵반대 싸움은 큰 의미를 남겼다. “시민사회가 그처럼 대중적인 운동을 한 경험이 없었거든요. 이런 게 대중운동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 대중과 어떻게 호흡하며 운동해야 하는지 자신감도 많이 얻었습니다.” 김 실장은 “노 대통령은 환경단체뿐 아니라 자신의 개혁정책을 끌어가는 데 지지세력이 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귀기울이고 시민사회와 소통구조를 만들어야 남은 3년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용실 아줌마’ 이옥수(51)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오지랖이 넓다. 종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이씨는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의 직전인 지난해 3월11일부터 저녁 7시면 생업을 작파하고 거리로 나섰다. 대통령 탄핵안이 결의되던 날엔 새벽 2시 집회가 끝나고 울면서 걸어 집에 갔다. 그의 촛불집회는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될 때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말에는 밤마다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농성단에 참여했다. “생업이 있어서 계속 굶지는 못하고 매일 저녁 농성단에 합류해 단식을 했지만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끄러웠다”고 했다.
이옥수씨 “기득권세력 아직 막강…서서히 가도 바르게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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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4월14일 서울 명동성당 앞 촛불집회장의 이옥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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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같아요. 기회를 줬는데도 계속 놓치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요즘 이씨의 마음도 좋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씨는 “국가보안법 단식농성단 해단식날 ‘세상과 역사를 바꾸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라고 생각했다”며 “몸은 썩어도 정신은 변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수구정신’은 참 어찌해보기 어려운 것 같다”고 ‘수구 책임론’을 폈다. 요즘은 “승조씨인가 지만씨인가 하는 사람들 친일 발언을 보면서는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인터넷에 댓글 다는 맛으로 겨우 산다”고 했다.
이씨는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 “제가 고향이 강남이라서 그 쪽에 친구들이 많은데, 그 애들 만날 때마다 ‘세금이 너무 올라서 못 살겠다’며 대통령 욕하는 소리를 들어요. 있는 것들이 더 한다니까요.” 그는 “대통령이 경제 살리겠다고 나서는 건 이해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조세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라며 “사용자들도 비정규직 늘리려고만 하지 말고 노동자들과 함께 살 생각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영업자인 이씨의 요즘 가계 형편은 어떨까. “저요.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그냥 먹고는 살만큼 벌어 쓰고 있어요.” 그러나 이씨는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기득권 세력이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개혁이 쉽겠어요? 그렇지만 서서히 가도 바르게 가면 언젠가는 될 겁니다.” 그는 “대통령도 그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가족 12명 참가 나은경씨 “작은 승리의 기억이 미래의 희망”
탄핵반대 촛불집회 최대 규모였던 지난해 3월20일 광화문 집회에 친정 쪽까지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참가했던 나은경(42·작가)씨는 ‘희망’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노 대통령과 여당이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다. “그 때도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 한 게 아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선 거지요.” 나씨의 희망은 오히려 그 쪽에 대한 기대가 애초부터 크지 않은 데서 오는 희망인지도 모른다.
“개혁을 힘있게 밀고 나가길 바라는 마음은 저나 그때 촛불집회에 나갔던 다른 모든 분들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걸 뒷받침할 만한 힘이 아직 모자라는 게 우리의 현실인 것 같아요. 그래도 해방 50여년 밖에 안 된 나라가 국민의 힘으로 이만큼 민주화를 이룬 게 어딥니까. 우리나라 참 자랑스런 나라라고 생각해요.” 나씨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의 낙관론은 실망의 끝에서 길어올려진, 근거 있는 낙관론처럼 보였다.
그는 지난해 총선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총선 결과가 만족스럽진 않았다. 여든 야든, 바라는 사람만 뽑힌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87년 6·10항쟁 뒤 대통령 선거에서 좌절했던 경험에 견주면 지난해엔 분명히 성과가 있었다. “사소한 것도 직접 해보고 성취감을 느끼면 다음에 일할 때 자신감이 생기잖아요. 작은 승리라도 승리의 기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씨는 “지난해 총선의 기억은 좌절하지 않고 맞설 때 작으나마 손에 쥘 수 있다는 승리의 기억”이라고 돌이켰다.
가슴속 희망의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나씨는 요즘 조금씩 거품을 잡아나가는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서 개혁의 희망을 본다고 했다. “내 조그마한 아파트도 값이 내려갔지만 덩치 큰 아파트 값은 더 떨어졌을 테니 참 다행입니다. 부동산 정책을 이끌던 부총리 자신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물러난 게 우리의 현주소이긴 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여론으로 그런 사람에게 엄격히 책임을 물을 수 있었던 것도 소중한 승리의 기억입니다.” 나씨는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실망하고 등돌리지 말고 현실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작은 승리의 기억이 요즘 ‘독도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쑤신다”고 말했다.
1년 동안의 경험이 다르고 현실에 대한 희망에 편차는 있지만, 지난해 광화문에서 대통령 탄핵을 규탄하며 촛불을 밝혔던 이들의 마음 속에 희망의 불은 꺼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들이 희망의 불을 끄지 않는 한 그들의 촛불은 국회의장의 의사봉보다 언제나 더 강할 것처럼 보인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