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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진실 밝혔으니 더는 원망 없어”

등록 2007-02-06 19:44

진실화해위서 조작간첩 결정 받은 신귀영씨
‘보안법 바로알기’ 운동나서

부산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신귀영(70)씨 집안의 시계는 1980년에서 멈춰 서있다. 이미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집안 전체가 ‘빨갱이’로 몰리면서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 가운데 재일교포 한명쯤, 선원 한명쯤 있는 것이 부산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씨 집안은 이것이 화근이었다.

4남2녀의 넷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난 신씨는 해방 직후 부모를 따라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으나, 큰형 수영(81)씨는 일본에 눌러앉았다. 신씨 형제는 수영씨가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에 가입하면서 고향 땅을 밟을 수 없게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됐다. 60년대부터 원양어선 선원으로 일하던 신씨는 가끔씩 배가 일본에 정박하면 큰형을 만나 서로의 소식을 전하곤 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이 신씨를 포함한 집안 전체에 되돌릴 수 없는 화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 2월26일 아침 신씨는 예비군훈련을 받으러가다 붙잡혀 부산시경 대공분실로 강제연행됐다. 뒤이어 그의 둘째형 복영(74)씨와 당숙 춘석(69)씨, 사촌 매제 서성칠(당시 46·1988년 사망)씨 등 집안 남자 10여명이 줄줄이 연행됐다. 연행 이유는 간첩인 큰형 수영씨의 지령에 의해 남한의 군사기밀을 캐내 수영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집안 전체가 ‘빨갱이’로 몰린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간첩단 우두머리로 지목된 수영씨는 조총련 소속이라 한국에 발을 디딜 수 없었으며, 조사에서도 완전히 배제됐다. 당시 몇몇 사람은 자신의 ‘빨갱이 혐의’를 벗기 위해 이들이 빨갱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노릇을 했다. 이때 갈라진 골은 지금도 메워지지 않고 있다.

그해 10월15일 부산지법 제5형사부는 신씨와 서성칠씨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 춘석씨에게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 복영씨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 집예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항소와 상고는 모두 기각돼 다음해 6월23일 판결이 확정됐다. 실형을 선고받은 신씨와 서성칠씨, 신춘석씨 등은 당시 선원이었거나 예전에 선원이었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신씨는 경찰 조사를 받았던 기간까지 보태 15년 3개월 21일 동안 감금돼 있다 1995년 6월17일 출소해, 99년 2월15일 사면복권, 다음해 2월15일 보안관찰처분 면제됐다. 춘석씨는 1989년 10월 만기를 10개월 정도 앞두고 출소했다. 하지만 서성칠씨는 대구교소도에 수감돼 있던 1989년 5월9일 결국 병을 얻어 옥사했다.


이들은 출소 이후 줄곧 행상, 경비원, 막노동 등을 하면서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다. 신귀영씨와 신춘석씨, 서성칠씨의 유족 등은 1995년 자신들의 범죄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증거자료와 검찰이 증인으로 내세웠던 사람들이 쓴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허위자백했다”는 내용증명 등을 확보해 부산지법에 재심 청구했다.

신춘석씨의 대표적 범죄사실은 1966년초 부산 해운대구 송정동에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송정삼거리 부근에 내려 육군 탄약창 사진을 찍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가다 군사시설인 수영비행장 앞에서 내려 비행장 사진을 찍은 뒤 이를 신수영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춘석씨는 송정동과 해운대해수욕장을 연결하는 도로는 1970년 6월30일 완공돼, 이곳을 운행하는 버스 역시 그 이후에 개통됐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더구나 춘석씨는 1965년 9월16일부터 다음해 9월12일까지 외항선을 타고 나가 한국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성칠씨의 범죄사실에는 1972년 4월초 부산 중구 광복동 근학서점에서 부산시가지도, 부산항만시설지도 등을 구입해 신수영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근학서점은 1975년초 문을 열었으며, 그 이전에 근학서점 자리에는 이발소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근학서점은 부산항만시설지도를 팔지 않았다.

신귀영씨는 부산시 전화번호부를 가져오라는 지령을 받고 3년1개월 뒤에야 큰형 수영씨에게 전달한 것으로 되어있는 점, 군부대 사진을 찍어오라는 지령을 받고 3년2개월만에야 필름을 전달한 것으로 되어있는 점 등이 짜맞추기 수사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왕복 4차로”라는 ‘국가기밀’을 누설한 것도 그의 범죄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신수영씨는 해방 이후 50여년만인 2003년 9월 처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한국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받았다. 검찰은 그를 일본 고베시 조총련 간부라고 했으나 그는 고베시에서 700㎞ 정도 떨어진 지바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고베시의 조총련 간부가 될 수 없으며, 집안 사람들에게 남한의 군사기밀을 캐오라고 지시한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신춘석씨와 서성칠씨를 태어나서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밝혔다.

이들의 재심청구는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에서 잇따라 받아들여졌으나, 대법원은 지난 2004년 6월10일 기각 판결했다. 기각 이유로 대법원은 “유죄의 증거로 삼은 증인들의 각 증언이 허위라는 점이 적극적으로 입증된 것으로 보기 어렵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들이 새로 발견된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유죄의 증거로 채택된 진술이 수사기관의 고문이나 감금 등 범죄행위로 얻어진 것임을 인정하거나 그에 대신하는 증명이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심 기각 결정도 “이미 나의 인생은 끝났지만 ‘간첩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자식들의 피해만이라도 막아야하지 않겠느냐”는 이들의 마지막 소망을 꺾지는 못했다. 자신들을 조사했던 경찰과 검찰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서슬 퍼른 1980년 당시에는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지 않느냐”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사정도 하고, 때로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며 ‘협박’도 했다. 최근에는 인터넷 사용법을 익혀 온라인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집안 전체가 ‘빨갱이’로 몰려 명절에도 친구들은 물론 일가친지들조차 만나고 모이기를 꺼리는 이들의 고통은 이제 끝났지만, 무심한 세월은 이들을 ‘국가보안법에 정통한 늙은 투사’로 만들었다.

부산/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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