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된 이필상 총장의 논문에 대한 판단들
고려대 이 총장 ‘논문표절’ 연구부정행위 명백한데
지난해 말 불거진 이필상 고려대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이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학문적 윤리를 어겼느냐’는 본질적 문제는 증발된 채 교수사회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연구윤리 가이드라인과 고려대가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윤리기준 등에 비춰 보면, 문제되고 있는 이 총장의 논문들은 대부분 연구부정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명백한 연구부정행위=과학기술부는 지난해 6월 ‘연구윤리·진실성 확보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연구부정행위의 유형으로 △위조 △변조 △표절 △부당한 논문저자 표시 등 6가지를 들고 있다. 이 가운데 ‘부당한 논문저자 표시’는 연구 내용 또는 결과에 기여를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논문저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행위 등을 가리킨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이 총장이 제자들의 학위 논문과 같은 내용으로 1988년 교내 학회지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은 “표절이 아니라 저자 표시 논란의 문제일 뿐”이라는 이 총장의 소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엄연히 연구부정행위의 한 유형인 ‘부당한 논문저자 표시’에 해당한다. 제자들과 함께 한 연구 결과를 학위 논문으로 낸 뒤 같은 내용을 별도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제자들의 이름을 뺀 채 자신의 이름만 올렸기 때문이다.
이들 논문은 고려대가 자체 마련 중인 윤리지침에도 어긋날 가능성이 높다. 김병호 교원윤리위원장(재료공학)은 “기준이 엄격한 미국 연구진실성국(ORI)과 과기부의 가이드라인을 참고한 뒤 그 중간 수준에서 연구윤리지침을 만들어 지난달 15일 교무처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이 지침에 담긴 부정행위 유형으로 △표절 △이중 게재 △분할 게재 등을 제시했는데, 이 기준에 비춰 볼 때 문제의 논문 두 편은 ‘표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중 게재’에는 해당하는 것이다.
이 총장이 94년과 96년 하반기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도 제자들의 석사학위 논문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앞의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논문저자 표시’에 해당한다.
또 96년 상반기와 2001년 발표된 논문의 경우, 각각 6곳과 4곳에서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해당 부분에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과기부 가이드라인에 비춰 볼 때 “타인의 아이디어, 연구내용·결과 등을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 없이 도용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 총장의 주장대로 참고문헌에 해당 논문이 표시돼 있기는 하지만, 여기엔 구체적으로 인용한 부분을 밝히지는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표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학문적 결론 없고 정치적 대립만=고려대 진상조사위는 연구부정행위를 가리는 분명한 기준부터 설정하고 이에 비춰 이 총장의 논문들을 평가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기준도 없이 표절 여부를 두고 ‘말싸움’만 하는 형국이다. 하종호 교수의회 총무(철학)조차 “진상조사위는 표절을 극히 상식적이고 초보적인 선에서 지적했다”고 말했다.
교수의회도 두 차례나 회의를 열고도 표절 여부에 대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였다. 이 총장의 거취 문제와는 별개로, 학문적 쟁점인 표절 여부마저 뚜렷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의회 의장단은 6일과 7일 잇따라 이 총장의 추가 표절 사례를 ‘폭로’하고 이에 맞서 이 총장 쪽이 반박에 나서는 등 감정대결만 이어지고 있다. 학문적 결론을 내야 할 일을 두고 정치적 대립만 일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두고 박거용(상명대 영어교육) 한국대학교육연구소장은 “애초의 표절 의혹을 분명하게 가리지도 못하고 총장을 둘러싼 권력 싸움으로 변질해 버렸다”고 평가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다함께 고대모임’은 6일 총학생회 누리집과 대자보를 통해 “이 총장은 제자의 학문적 업적을 빼앗았으며 교수의회는 무책임한 모습만을 보였다”고 말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