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고려대 총장이 논문 표절 의혹과 관련해 전체 교수들의 찬반투표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러 지난 9일 오전 교수총회가 열린 고려대 인촌기념관을 나서 본관으로 향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총장 임명제로 선회땐 또다른 불씨 될듯
자성 바탕 연구윤리 규정 제도화 계기로
자성 바탕 연구윤리 규정 제도화 계기로
고대총장 사퇴 뭘 남겼나
이필상 고려대 총장이 취임 56일 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나 ‘최단기 총장’이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그동안 고려대의 명예는 ‘만신창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곤두박질했다. 학내 구성원들 사이에 상처도 컸다. 그러나 총장직 사퇴만으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이필상 사태’는 앞으로도 크고 작은 갈등으로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표절, 결국 끝나지 않은 논란=정작 총장의 표절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관행이었다’거나 ‘저자 표시 논란에 불과하다’는 이 총장의 해명이 정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하종호 교수의회 총무(철학)는 “명백한 표절을 두고 논란 운운하는 이 총장의 변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할 정도다. 또한 △표절 행위의 시효 △교수와 제자의 공동연구 범위 △인용 방식의 학문 간 차이 등 표절의 기준을 놓고 풀어야 할 과제는 그대로 덮이고 말았다. 이 총장뿐 아니라 교수의회 소속 교수들도 학자답게 표절과 관련한 시시비비를 정교하게 가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현재 고려대 일부 학과에선 표절 공방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고려대 문과대 조아무개 교수는 지난해 12월 논문 1편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학교 쪽이 자신을 해임하자, 이에 불복해 서울중앙지법에 ‘해임처분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지난 13일 조 교수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같은 과 박아무개 교수는 “조 교수 역시 지난해 초 내가 쓴 논문 5편이 표절이라고 문제를 제기했었다”며 맞서고 있다.
이 대학 의대 최아무개 교수도 논문 4편을 외국 학술지에 중복 게재한 게 문제가 돼 지난해 10월부터 윤리위원회 조사를 받고 있다. 문제를 제기한 같은 과 조아무개 교수는 최 교수를 지난달 초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최 교수가 문제의 논문에 제자를 저자로 ‘거짓 등재’해, 신규 교수 임용 심사 과정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 교수 쪽은 조 교수 역시 논문을 표절한 사례가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연구윤리지침 마련 공감대 확산=이 총장의 표절 의혹이 불거지면서 표절은 이제 감출 수 없는 첨예한 논쟁거리이자 윤리적 잣대가 됐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고려대 정경대의 한 교수는 “이번에 이필상 총장의 표절 문제와 관련해 언론에서 보도한 과학기술부 연구윤리 지침 자체를 지금까지 전혀 몰랐다. 그 기준에 따르면 나도 표절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병호 고려대 교원윤리위원장(재료공학)도 “이미 일부 학회를 중심으로 표절 관련 규정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학과 학회에서 표절 문제에 대한 자성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와 서울대는 자체 연구윤리 지침을 마련해 올 상반기에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다른 대학들도 연구부정 행위의 정의와 유형, 조사 절차와 징계 등의 항목에 따라 지침 마련을 위한 준비 작업에 나선 상태다.
지난 15일 교육부가 발표한 연구윤리 실태 조사를 보면, 전국 249개 4년제 대학과 689개 학회 가운데 자체 연구윤리위원회를 둔 곳이 각각 28곳과 14곳에 그쳤다. 하지만 159개 대학과 151개 학회가 연구윤리 관련 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연구윤리 확립에 대한 공감대는 이뤄졌으나 제도화하는 데는 아직도 발걸음이 느린 셈이다. 교수사회 알력 노출=‘다른 대학(서울대) 출신의 유일한 총장’ ‘시민운동가 1세대’ 등 이필상 총장이 지녔던 참신한 이미지는 표절 논란에 휩싸이면서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다. 이 총장 쪽에서 같은 대학 교수들에게 ‘표절과 관련해 사퇴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며 자극적인 어법으로 교수의장단과 진상조사위 쪽을 공격하고 나선 뒤엔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갔다. 사퇴를 종용했다고 지목된 경영대 교수와 교수의장단 쪽이 거세게 반발하는 가운데, 이필상 총장은 신임투표라는 ‘꼼수’를 던졌다. 하지만 이번엔 이 총장과 교내 권력관계 모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여겨졌던 이과대·문과대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김병호 윤리위원장은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사이에는 학문 연구 방식 자체가 달라서 표절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다”며 “문과대 쪽에서 보면 당연히 표절이지만 응용학문 쪽인 경영대에서 보면 수긍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총장은 학문들 사이에 놓인 차이와 거리를 보지 못했거나 못 본 척한 셈이다. 총장 지명제가 능사인가?=현승종 이사장은 총장 사퇴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15일 “직선제와 간선제 모두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며 “이사회와 의논해 지명제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총장 개인의 문제를 빌미로 제도를 바꾸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역사교육과의 한 교수는 “이번 사태는 재단과 교수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며 “재단이 총장 지명제를 언급한 것은 재단의 전횡을 막아야 하는 큰 흐름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현재의 총장 선출 방식인 간선제는 교수의회가 후보들 가운데 부적격자를 가려낸 뒤 교수와 학생 대표, 직원과 교우회 등이 참가한 총장추천위원회의 선임, 그리고 재단의 최종 임명을 거치도록 돼 있다. 지난 2002년 재단과 교수협의회(현재의 교수의회) 사이의 타협의 결과였다. 때문에 재단이 다시 총장을 직접 임명하는 방식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경우 학교 안팎에서 불협화음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학교 어른들과 너무 친한’ 총학생회=‘표절 국면’에서 총학생회가 보인 태도도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 총장의 표절 의혹이 불거진 직후 학생들은 학교 홈페이지에서 표절과 관련해 난상토론을 벌였지만, 총학생회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교수들의 신임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인 지난 14일 밤에야 학교 인터넷 게시판에 “이 총장에게 손상된 명예를 복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책임을 묻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총장의 표절 의혹에 침묵하던 총학생회가 88.7%라는 교수들의 찬성투표율에 편승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총학 게시판엔 지난달 이 총장과 총학생회장이 ‘학교 발전’을 명목으로 대기업을 방문했던 일도 거론됐다. 재단과 학교본부를 견제하는 구실도 해야 할 총학생회가 급격히 ‘학교 어른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연구윤리 실태 조사
지난 15일 교육부가 발표한 연구윤리 실태 조사를 보면, 전국 249개 4년제 대학과 689개 학회 가운데 자체 연구윤리위원회를 둔 곳이 각각 28곳과 14곳에 그쳤다. 하지만 159개 대학과 151개 학회가 연구윤리 관련 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연구윤리 확립에 대한 공감대는 이뤄졌으나 제도화하는 데는 아직도 발걸음이 느린 셈이다. 교수사회 알력 노출=‘다른 대학(서울대) 출신의 유일한 총장’ ‘시민운동가 1세대’ 등 이필상 총장이 지녔던 참신한 이미지는 표절 논란에 휩싸이면서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다. 이 총장 쪽에서 같은 대학 교수들에게 ‘표절과 관련해 사퇴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며 자극적인 어법으로 교수의장단과 진상조사위 쪽을 공격하고 나선 뒤엔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갔다. 사퇴를 종용했다고 지목된 경영대 교수와 교수의장단 쪽이 거세게 반발하는 가운데, 이필상 총장은 신임투표라는 ‘꼼수’를 던졌다. 하지만 이번엔 이 총장과 교내 권력관계 모두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여겨졌던 이과대·문과대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김병호 윤리위원장은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사이에는 학문 연구 방식 자체가 달라서 표절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다”며 “문과대 쪽에서 보면 당연히 표절이지만 응용학문 쪽인 경영대에서 보면 수긍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총장은 학문들 사이에 놓인 차이와 거리를 보지 못했거나 못 본 척한 셈이다. 총장 지명제가 능사인가?=현승종 이사장은 총장 사퇴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15일 “직선제와 간선제 모두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며 “이사회와 의논해 지명제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총장 개인의 문제를 빌미로 제도를 바꾸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역사교육과의 한 교수는 “이번 사태는 재단과 교수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며 “재단이 총장 지명제를 언급한 것은 재단의 전횡을 막아야 하는 큰 흐름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현재의 총장 선출 방식인 간선제는 교수의회가 후보들 가운데 부적격자를 가려낸 뒤 교수와 학생 대표, 직원과 교우회 등이 참가한 총장추천위원회의 선임, 그리고 재단의 최종 임명을 거치도록 돼 있다. 지난 2002년 재단과 교수협의회(현재의 교수의회) 사이의 타협의 결과였다. 때문에 재단이 다시 총장을 직접 임명하는 방식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경우 학교 안팎에서 불협화음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학교 어른들과 너무 친한’ 총학생회=‘표절 국면’에서 총학생회가 보인 태도도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 총장의 표절 의혹이 불거진 직후 학생들은 학교 홈페이지에서 표절과 관련해 난상토론을 벌였지만, 총학생회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교수들의 신임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인 지난 14일 밤에야 학교 인터넷 게시판에 “이 총장에게 손상된 명예를 복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책임을 묻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총장의 표절 의혹에 침묵하던 총학생회가 88.7%라는 교수들의 찬성투표율에 편승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총학 게시판엔 지난달 이 총장과 총학생회장이 ‘학교 발전’을 명목으로 대기업을 방문했던 일도 거론됐다. 재단과 학교본부를 견제하는 구실도 해야 할 총학생회가 급격히 ‘학교 어른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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