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 1907년 기사
문헌연구자 이순우씨,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3일치 기사 발굴
당시 일본 척무(식민지) 장관은 “운하 개발을”
춘원 이광수 좌담회서 “세검정 물 막아 청계천에 댈 의사 없냐”
당시 일본 척무(식민지) 장관은 “운하 개발을”
춘원 이광수 좌담회서 “세검정 물 막아 청계천에 댈 의사 없냐”
일제 때도 서울 청계천에 한강의 물을 끌어다가 흘리려는 계획이 검토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운하를 파서 청계천을 거꾸로 흐르게 하려던 이런 계획은 한강물을 끌어다가 청계천 상류부터 흐르게 한 서울시의 복원 사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헌 연구자인 이순우씨는 최근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일제 때 신문 기사를 발굴해 공개했다. 이 자료들을 보면, 청계천에 한강물을 끌어들이려는 가장 첫 구상은 1907년 4월3일 <대한매일신보>에 나온다. 이 기사는 “일본인 기쿠치가 한강을 남대문까지 끌어들여 도성 안의 오물을 (청계천 하류) 오간수문쪽으로 씻어내기로 한다더라”는 내용이다.
이런 구상은 1914년 10월14일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에서 더 구체화한다. 고미야 미호마쓰 이왕직 차관은 “서울의 분수령인 남대문의 성밑을 파서 서울 중심을 흐르는 수표교천(청계천)과 동대문밖 한강과 연결해 거꾸로 흐르게 하면 미관도 더하고 시민의 편익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고미야의 제안에 대해 박현욱 청계천문화관장은 “남대문 부근을 파서 성안의 청계천 지천인 회현동천과 성밖의 한강 지천인 만초천(욱천)을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자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것은 한강과 낙동강을 문경 새재쯤에서 연결하는 ‘경부운하’ 계획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제안에 대해 모치지 로쿠사부로 조선총독부 토목국장은 1916년 6월28일 <매일신보> 기사에서 “현장조사해보니 한강 상류의 물을 끌어들여 청계천의 물을 마포로 거꾸로 흐르게 한다면 황토현(세종로 네거리)에서 오륙십척(15~18m)의 낙차가 생기고, 마포까지 터널을 뚫는 공사만 사오백만원의 비용이 들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이런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1933년 3월엔 경성부회(현재의 서울시 의회)에서 한 의원이 “청계천에 한강물을 끌어들일 수 없느냐”고 질문했으며, 1935년 9월에도 경성부회 의원들이 일본 도쿄를 찾아갔을 때, 고다마 히데오 일본 척무(식민지)장관은 “현재 청계천을 운하로 해 교통, 보건, 풍치를 좋게 하라”고 조언했다.
특히 1940년 5월12일 <매일신보>의 좌담회에선 향산광랑으로 이름을 바꾼 춘원 이광수가 나와 “당국은 세검정 물을 막아 청계천에 댈 의사가 없냐”고 묻고, 뒤에 고려대 총장·신민당 총재를 지낸 유진오가 “그렇게만 된다면 산수가 겸비한 아름다운 도시가 되겠다”고 맞장구치기도 했다. 당시 조고 에이지 경성부청 공영부장은 “세검정 물을 막아 청계천으로 대는 안과 한강 상류의 물을 청계천으로 끌어들이는 안을 생각중이며, 하나는 실현시키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들을 발굴한 이순우씨는 “도성의 하수도이자 마른내인 청계천에 물을 대는 일은 조선 때부터 오랜 고민거리였다”며 “일제 때의 운하 계획이나 한강물을 상류에 끌어다 붓는 현재의 청계천이나 자연을 살리지 못한 점에서는 모두 아쉽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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