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신부.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4월 혁명상’ 수상한 문정현 신부
75년 인혁당사건 후 ‘길위의 성직자’
“2년여 평택 싸움 결코 패배 아니다
4·19 정신도 6월항쟁에 이어졌잖아” ‘길 위의 신부’ ‘투사’ ‘싸움꾼’ ‘노숙자’. 전북 익산시 월성동에 있는 정신지체아동시설인 ‘작은 자매의 집’의 문정현(68) 신부에게는 늘 여러 이름이 따라다닌다. 유신 독재정권이 한창인 1975년, 하루 아침에 간첩단으로 내몰려 죽음을 당한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시작으로 최근 평택 대추리에서의 미군기지 이전 확장반대에 이르기까지 거친 들판에서 30여년을 한결같이 보내온 노 신부가 올해 4·19혁명 47돌을 맞아 ‘제18회 4월 혁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8일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수상식 참석차 길을 나선 문 신부는 지난 9일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마을 이주를 끝으로 그동안 전북 익산에 내려가 장애어린이들을 돌봐왔다. “그동안 줄곧 땅만 팠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 평택 대추리 주민으로 2년여 동안 미군기지 이전 확장 반대투쟁을 해온 문 신부는 “물리적으로 진 싸움”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5월4일을 보면 알지 않아. 2만명의 경찰과 수천명의 군인, 헬리콥터가 뜨고 부교가 설치되고 그 쪼그만 시골에서 ‘여명의 황새울’이라며 국민을 상대로 그런 작전을 하는 것이 어디 있어.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이 참상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문 신부는 이것을 “국가 폭력”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논리가 없었잖아. 일처리를 하면서 대화를 애기했지만 생색용이었지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아니었잖아. 수순대로 밀고나가면서 군까지 동원하고 ….” 문 신부는 “주민들이 나가야 될 당위성이 없는데,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것뿐이야. 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는거야. 당위성이 없는거야. 그렇지만 씨앗은 남아 있어”라고 말했다. 주민들과 함께 밀려나면서 울고, 935일간 지켜온 촛불집회를 거두면서 울고,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노 신부는 그러나 “진짜 패배는 아니다”라고 했다. 2년여 동안 주민들은 물론 전국에서 평택 대추리로 몰려든 평범한 시민 학생과 장애인, 그리고 꼬마 아이들을 보면서 문 신부는 “평화 생명 운동의 큰 물결을 보았다”고 했다. “평화가 무엇이냐고? 평화는 노동자가 해고된 직장에 다시 복귀하는 것이고, 농민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땅을 강제로 빼앗기지 않고 농사짓는 일이며, 장애인이 아무런 제약 없이 어디든지 다닐 수 있는 것이 평화야. 평택은 바로 그 평화를 온몸으로 이야기한 거야. 이 싸움에서 졌다고 우리가 주저 앉아서는 안될 이유이기도 하고 ….”
4·19 당시 서울 가톨릭신학교의 평범한 신학도였던 문 신부. 그는 “4·19 혁명이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짓밟혔지만 그래도 그 정신이 역사 속에 다시 살아나 6월 항쟁으로 이어졌잖아. 마찬가지야. 지금 대추리의 눈물을 우리가 잊지 않는 한 언젠가는 다시,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평화의 물결들로 살아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말했다. 글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2년여 평택 싸움 결코 패배 아니다
4·19 정신도 6월항쟁에 이어졌잖아” ‘길 위의 신부’ ‘투사’ ‘싸움꾼’ ‘노숙자’. 전북 익산시 월성동에 있는 정신지체아동시설인 ‘작은 자매의 집’의 문정현(68) 신부에게는 늘 여러 이름이 따라다닌다. 유신 독재정권이 한창인 1975년, 하루 아침에 간첩단으로 내몰려 죽음을 당한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시작으로 최근 평택 대추리에서의 미군기지 이전 확장반대에 이르기까지 거친 들판에서 30여년을 한결같이 보내온 노 신부가 올해 4·19혁명 47돌을 맞아 ‘제18회 4월 혁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8일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수상식 참석차 길을 나선 문 신부는 지난 9일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마을 이주를 끝으로 그동안 전북 익산에 내려가 장애어린이들을 돌봐왔다. “그동안 줄곧 땅만 팠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 평택 대추리 주민으로 2년여 동안 미군기지 이전 확장 반대투쟁을 해온 문 신부는 “물리적으로 진 싸움”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5월4일을 보면 알지 않아. 2만명의 경찰과 수천명의 군인, 헬리콥터가 뜨고 부교가 설치되고 그 쪼그만 시골에서 ‘여명의 황새울’이라며 국민을 상대로 그런 작전을 하는 것이 어디 있어.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이 참상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문 신부는 이것을 “국가 폭력”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논리가 없었잖아. 일처리를 하면서 대화를 애기했지만 생색용이었지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아니었잖아. 수순대로 밀고나가면서 군까지 동원하고 ….” 문 신부는 “주민들이 나가야 될 당위성이 없는데,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것뿐이야. 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는거야. 당위성이 없는거야. 그렇지만 씨앗은 남아 있어”라고 말했다. 주민들과 함께 밀려나면서 울고, 935일간 지켜온 촛불집회를 거두면서 울고,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노 신부는 그러나 “진짜 패배는 아니다”라고 했다. 2년여 동안 주민들은 물론 전국에서 평택 대추리로 몰려든 평범한 시민 학생과 장애인, 그리고 꼬마 아이들을 보면서 문 신부는 “평화 생명 운동의 큰 물결을 보았다”고 했다. “평화가 무엇이냐고? 평화는 노동자가 해고된 직장에 다시 복귀하는 것이고, 농민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땅을 강제로 빼앗기지 않고 농사짓는 일이며, 장애인이 아무런 제약 없이 어디든지 다닐 수 있는 것이 평화야. 평택은 바로 그 평화를 온몸으로 이야기한 거야. 이 싸움에서 졌다고 우리가 주저 앉아서는 안될 이유이기도 하고 ….”
4·19 당시 서울 가톨릭신학교의 평범한 신학도였던 문 신부. 그는 “4·19 혁명이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짓밟혔지만 그래도 그 정신이 역사 속에 다시 살아나 6월 항쟁으로 이어졌잖아. 마찬가지야. 지금 대추리의 눈물을 우리가 잊지 않는 한 언젠가는 다시,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평화의 물결들로 살아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말했다. 글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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