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5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지난 1993년 시작해 13년째 600회 목요집회를 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민가협 ‘잿빛시대 보랏빛 고운 꿈’ 출간
민청학련 계기…구가협부터 민가협까지
공덕귀·박용길 등 70~80년대 ‘가족운동’
민청학련 계기…구가협부터 민가협까지
공덕귀·박용길 등 70~80년대 ‘가족운동’
“가족운동은 이기는 싸움이다. 승리를 얻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포기할 수 없는 피로 맺은 관계이다.” ‘가족운동’이라니 다소 생소하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그 사례들을 흔하게 보아왔다. 보랏빛 스카프를 두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의 가족 구명 시위 장면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까 가족운동이란 양심수 가족들의 혈육 석방 운동이자 그로 말미암은 민주화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이후 가족운동의 역사, 그리고 그 과정의 생생한 일화를 엮은 〈잿빛시대 보랏빛 고운 꿈-7·80년대 가족운동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출간됐다. 가족운동의 맹아는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었다. 10월유신을 비판하는 유인물 배포 혐의로 박형규 목사 등이 구속됐다. 박 목사의 부인 조정하씨는 남편이 구속된 뒤, “구치소 앞마당 나무에 기대서 울고, 면회하면서 울고” 혼자서 울고만 다녔다. 하지만 남편의 석방 투쟁을 거쳐 그는 ‘구속자 가족들의 선생’으로 변신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그해 9월 민가협의 전신인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가 꾸려진다. 초대 회장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기소된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씨가 맡았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가족운동의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다.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다. 3·1사건 관련자들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갈 때 아내들도 함께 붙들려 갔다. 박 장로,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화장실을 간다며 조사실 밖으로 나온 뒤 시동생 문동환 박사가 취조받는 조사실로 들어가 진술내용에 대해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다음날부터 모든 조사실에는 ‘조사중 출입금지’ 푯말이 나붙었다. 고난을 뜻하는 보라색이 가족운동의 상징색이 된 것도 3·1사건 공판 때부터였다. 구가협은 1976년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로 개칭했다. 1979년 터진 남민전 사건은 가족운동의 큰 분수령이었다. 남민전 관련자 가족들의 당시 별명은 ‘남씨네’였다. 좌익으로 분류돼, 가족운동 단체나 기독교·가톨릭계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김수한 추기경 방 앞에서 두번이나 농성했으나 쫓겨나야 했다. 하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은 아무리 병환 중일 때라도 이들이 방문하면 꼭 나와서 영접을 해줬고, 부인 공 여사는 자상하게 음식을 차려주며 안타까워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도 언제나 따뜻하게 이들을 맞아주었다.” ‘남씨네’는 이후 가족운동의 터줏대감 구실을 하면서 1985년 민가협 창립의 주춧돌 노릇을 했다. 민가협은 과거와는 달리, 시국 사건 가운데 장기수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다. 70년대 가족운동의 무대는 주로 성당과 교회였다. 찬송가도 불러야 했다. 종교가 달랐던 민청학련 관련자인 유인태씨 어머니는 시위용품을 만드는 것으로 운동의 대열에 동참했다. 이 책은 전 민청련 의장 고 이범영씨의 부인으로 민가협 창립 이후 활동을 주도해온 김설이씨와 민가협 창립 이후 상근 간사로 활동해온 이경은씨가 함께 썼다. (02)3709-7500.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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