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사 순국95돌 앞두고 철거 주장 ‘고개’
안중근(1879~1910)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남산공원에 세워진 ‘안중근 기념관’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오는 26일은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지 95년이 되는 날이어서 이 글씨를 유지할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71년 문을 연 안중근 기념관 정문 앞에는 가로 6m, 세로 3m의 자연석으로 만든 기념비에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는 글씨가 이른바 ‘사령관체’(박정희의 글씨체를 이르는 별명)로 크고 힘차게 쓰여 있다. 또 그 아래엔 ‘1979년 9월2일 대통령 박정희’라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의’를 제외한 모든 글씨는 한자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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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사슬에 묶인 안중근 의사.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내 마음의 안중근>에 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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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다란 기념비는 79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당시 정부는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대대적인 추모 행사와 기념관 성역화 사업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해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부분 사업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글씨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를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에 세운 것은 민족혼을 짓밟는 행위”라며 “하루빨리 이 글씨를 치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 터는 1920년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 내선 일체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신궁’을 세운 자리이기도 하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민족정기’ 운운한 이 글씨는 독립군 자격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조국을 위해 투신한 모든 의사들의 정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국가보훈처도 이런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 11월 탑골공원에 걸려 있던 박정희 글씨의 ‘삼일문’ 현판을 뜯어내 부쉈던 곽태영 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 대표는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장교로서 일본 제국주의 승리를 위해 복무했던 인물”이라며 “순국 95주기를 맞는 안 의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념관을 운영·관리하는 안중근 숭모회 김광시 사무처장은 “박 전 대통령이 친일을 했든 안 했든 순수한 마음으로 안 의사를 추모하고 존경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기념비 철거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처장은 “안 의사는 원래 동양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감싸는 분이고, 박 전 대통령의 마음도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문화재청은 지난 1일 부숴진 충남 예산군의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 현판을 “원래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복원하겠다”는 예산군의 문화재 현상변경 신청을 다음달 15일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검토하기로 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박정희 글씨 어떻게 해야 하나?
전국에 1200점…항일·임란관련 15건
삼일문, 광화문, 윤봉길 기념관, 안중근 기념석 등 각종 문화재와 기념물에 쓰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잇따라 논란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나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운 애국자들의 유적에는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24일 <한겨레>가 문화재청의 ‘전직 대통령 필적 현판 현황’을 분석한 결과, 박 전 대통령이 쓴 현판과 기념비 34건 가운데 임진왜란과 항일투쟁에 관련된 곳은 절반에 가까운 15건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한산도 충무사, 아산 현충사 현판 등 이순신 장군 관련 글씨가 12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박 전 대통령 스스로 깊이 존경한데다, 독재 시절 이데올로기 장치로 활용된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애국자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부산 충렬사 현판 등 3건은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연관됐다. 일제 때 항일투쟁과 관련된 유적은 이번에 부숴진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가 있었다.
이밖에 서울 동작구 사육신묘 현판 등 8건은 충신 등의 유적, 제주 항몽순의비(삼별초의 몽고에 대한 항쟁 기념비) 등 2건은 외세에 대한 항전 유적, 광화문 현판 등 3곳은 왕실과 연관됐다. 그밖에도 6건이 더 있다.
문화재에 쓴 대통령 글씨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의 글씨는 43건 중 34건(79%)으로 가장 많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3건, 노태우·최규하 전 대통령은 각 2건, 윤보선·김대중 전 대통령은 각 1건에 그쳤으며,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화재에는 필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밖에 각종 기념물에도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서울 은평구 구파발 ‘통일로’ 비석 등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89년 민족중흥회가 펴낸 박 전 대통령 휘호집 <위대한 생애>를 보면, 그는 집권 18년 동안 전국에 1200여점의 글씨를 남겼다. 해마다 66점 이상, 매주 1점 이상 쓴 셈이다.
물론 이 많은 박 전 대통령의 글씨를 모두 문제삼고 철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도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의 글씨라고 해서 모두 철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항일과 관련된 인물이나 유적에 남아 있는 박 전 대통령의 글씨에 대해서는 먼저 철거를 검토해야 한다”며 “나머지 글씨들은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성 등을 고증해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 교체하고 따로 보관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번 박 전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교체를 밝혔다가 보수 언론들에 맹타를 당한 문화재청은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다. 문화재청의 한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박 전 대통령이 문화재에 쓴 현판 글씨를 바꿀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절차도 간단하지 않다. 문화재에 쓴 박 전 대통령의 글씨를 바꾸려면, 국가·지방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실제로 수원 화령전(정조의 사당)의 운한각 현판은 지난해 12월 경기지방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예가 정도준씨의 글씨로 바뀌기도 했다. 문화재가 아닌 기념물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직권으로 교체할 수 있다.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박 전 대통령이 문화재에 쓴 글씨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옳지는 않지만, 이번에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역사적인 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