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화학공업㈜에서 제조한 ‘SY-44’
‘20년전 시위’ 키워드로 본 6월 항쟁
87년 ‘6월 항쟁’ 관련 기사나 자료를 읽다 아예 알 수 없거나 알쏭달쏭한 용어 때문에 힘겨워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끝내 목숨을 잃은 이한열씨를 두고 ‘무슨 포탄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6월 항쟁을 3·1운동 만큼도 모른다는 자조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겨우 20년전 일인데도 세월의 풍화작용이 강력한 탓이다.
용어나 개념은 현실의 반영이면서 사실을 이해하는 열쇠 구실을 한다. 6월 항쟁 때 가장 많이 외쳐졌던 구호 ‘호헌철폐’의 ‘호헌’도 이제는 설명이 필요하다. 기존 헌법을 지키겠다는 정부 방침이 왜 국민의 거센 저항을 불렀는지 역사적 맥락을 모르면 알 수 없다. 이름만 남아 있는 최루탄은 ‘경찰박물관’(02-735-2519, www.policemuseum.go.kr)의 전시물이 돼 있다. 6월 항쟁을 앞장 서 이끌었던 운동권에서는 공안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은어나 비어를 많이 썼다. 예를 들어 성명서를 가리키는 ‘피(영어 Paper의 두문자 P)’가 은어라면, 대학 구내에 상주하던 경찰을 지칭하는 ‘짭새’는 비어의 대표적 사례다. 87년 6월 전후 대중적으로 많이 쓰인 키워드 18개를 사진과 함께 풀어본다.
<시위진압 관련 용어>
최루탄 :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사하던 진압용 화학무기의 하나로, 원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도록 만들어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주성분은 클로로피크린(CCl3NO2·살충제 요소)과 클로로아세토페논(C8H7OCl) 등으로 구성된 CS가스로, 밀가루와 비슷한 흰색이나 노란색 분말 형태를 띤다. 1개당 최루분말의 무게는 82g이고, 분말을 담은 탄통은 회색이나 노란색. 통상 여러 발을 한꺼번에, 다양한 방향과 각도로 쐈다. 최루탄이 시위대 머리 위나 가까운 공중에서 터져 분말 성분이 눈 또는 호흡기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우선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의 격심한 통증이 일어난다. 동시에 눈물·콧물이 마구 흘러내리며 일시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구토 증세도 나타난다. 노출된 목이나 겨드랑이처럼 연약한 부위는 피부가 부풀어 올라 물집(수포)이 잡히기도 하고, 심하면 화상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경찰의 공식적인 설명은 “일시적으로 호흡장애나 눈물을 흘리게 할뿐 인체에 장애를 남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성분의 유해성을 놓고는 반론도 많이 제기됐다.
군용 유탄발사기를 개조한 총기의 탄통에 최루탄을 넣고 상방 15도 각도로 쏘면 80~120m를 날아간다고 경찰은 설명한다. 그러나 시위대와 충돌이 격화되면 경찰은 시위대를 똑바로 겨냥해 최루탄을 쏘곤 했다. 시위대는 수평 발사된 최루탄을 ‘직격탄’이라고 불렀다. 87년 당시 연세대 2학년 학생이던 이한열씨는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직격탄 파편에 머리를 맞아 희생됐고, 84년에도 고려대 신입생 최아무개씨가 얼굴을 정면으로 맞아 한쪽 눈을 잃는 등 크고 작은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은 삼양화학공업㈜이 제조한 ‘SY-44’(SY는 제조 회사인 삼양화학의 영문 머리문자)탄을 많이 사용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최루탄 특수’를 맞은 이 회사는 한때 매출액이 500억원을 넘었고, 한영자 대표는 87년 28억원의 세금을 내 개인납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루탄이 언제 처음 쓰였는 지는 경찰도 모른다. 다만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98년 9월3일 만도기계 파업 때로 기록돼 있다. “그 뒤로는 쓰인 적이 없다”는 게 경찰의 공식 설명이다. 현재 경찰이 보유하고 있는 최루탄 ‘재고’는 71만여발인데, 80년대의 ‘추억’이 어린 SY-44탄은 재고가 없고 남아 있는 것은 KP-1과 KP-2탄 두 가지 종류라고 한다. 이 수치는 사과탄과 다연발탄(지랄탄)을 모두 합친 규모다.
사과탄 : 최루탄의 일종이지만, 크기와 발사방법 등에서 최루탄과는 다르다. 경찰쪽 분류에서는 ‘KM 25탄’이라고 부른다. 한손에 잡히는 작은 크기에 동그란 구형으로 생겼다고 해서 사과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최루탄은 총기에 넣어 쏘는 발사식인 반면 사과탄은 안전핀을 뽑은 뒤 수류탄처럼 목표물을 향해 던지는 투척식이다. 때문에 “최루탄을 던졌다”거나 “사과탄을 발사했다”는 표현은 엄밀하게 보면 잘못된 것이다. 사과탄의 공식적인 사양은 무게 170g, 직경 7cm, 안에 들어 있는 최루성분은 42g이라고 한다. 경찰의 사복체포조가 허리춤 등에 휴대하고 있다가 가까운 거리에서 시위대를 덮칠 때 대인 제압용으로 사용했다. 최루탄보다 분말의 양이 절반 가까이 적어 자극의 강도나 작용 범위는 약한 편이었지만, 사람 가까이에서 터지면 겉을 둘러싼 플라스틱 파편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부상을 당하는 사례가 잦았다.
지랄탄 : 대규모 시위 진압용으로 개발된 ‘다연발 최루탄’에 시위대는 지랄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64발 한 세트가 5~6초 안에 연속 발사되는 데, 회색 또는 청회색 연기를 내는 탄두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수분 동안 최루 가스를 뿜어냈다. 지랄탄이라는 이름은 이 탄두의 진행 방향이 제멋대로여서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지랄’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보통 다연발 최루탄 발사대는 시위진압용 장갑차인 경찰 페퍼포그 차량 위에 설치했고, 64발 1세트의 무게는 12kg이라고 한다. 1발당 들어 있는 최루 성분은, 최루탄(82g)이나 사과탄(42g)보다 적은 32g이고, 당시 고려화공이라는 회사에서 주로 생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도화선을 연결해 발사했고, 사거리는 대략 50~100m인데 발사대 각도로 조절했다.
페퍼포그(pepper fog), 페퍼포그 차량 : 시위 진압용으로 특수 제작된 4~6인승 검정색 장갑차량을 페퍼포그차, 거기서 내뿜는 회색 또는 청회색 최루가스를 ‘후추연막’이라는 뜻의 페퍼포그라고 불렀다. 차량 앞부분 운전석 아래쪽에 분사구를 설치해 가스를 뿜어냈다. 페퍼포그가 분사되는 모양은 장마철에 가끔 구경할 수 있는 연막소독과 흡사하다. 페퍼포그 차량은 해병대가 수륙양용장갑차를 앞세워 상륙전을 치르듯 진압경찰(전투경찰)의 맨앞에서 엄호 및 시위대 돌파용으로 주로 쓰였다.
페퍼포그는 그럴 듯한 시각적 효과에 비해 최루탄이나 지랄탄보다 자극의 강도가 약했다. 그나마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연기가 낮게 깔려 ‘효과’가 지속될 수 있었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쾌청한 날엔 뿌리자마자 연기가 날아가는 통에 목적을 달성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백골단(사복체포조) : 오토바이용 헬멧을 머리에 쓴 사복 차림의 체포조는 시위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거리시위에서 ‘근접전’이 벌어질 경우 백골단은 완전무장을 갖춘 전투경찰 대열 뒤에 배치돼 있다 시위 대열이 주춤거리거나 흩어지는 느낌이 들 때면 갑자기 사과탄을 던지며 뛰어나와 시위대를 덮쳤다. 전투경찰이 해산에 주력한다면 백골단은 체포가 주임무였던 것이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경찰 간부는 “최대로 많이 운영했던 87년 안팎에는 전국적으로 1만평 가량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출 대상은 검거작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전·의경 가운데 발이 빠른 사람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청재킷에 청바지 차림이 많아 ‘청카바’ 또는 오토바이 헬멧의 속칭인 ‘화이바’라고도 불렸다. 간이 진압복을 입고 정강이에는 각반을 찼으며, 신발은 운동화 차림이 많았다. 손에 단봉(짧은 진압봉)을 들고 대기하던 이들은 현장 책임자가 “돌격” 구호를 외치거나 “삑~”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시위대열을 향해 돌진했다.
짭새 : 83년까지는 대학 구내에 상주하면서 교내 시위를 초동 진압하던 사복경찰을 지칭했다. 84년 이후에는 정복이나 사복 경찰관 모두를 일컫는 일반적인 은어로 확장됐다. 교내 시위에 대비해 학교 안 여기저기 학생들 틈에 끼어 있다 시위가 발생하면 마치 새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듯 대응한다고 해서 ‘잡(雜)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짭새는 ‘잡새’가 경음화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학교 안 어디든 들어가 시위 학생들을 잡아갔다. 수업중인 강의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이 상주하던 때 대학 모습은 유시민 전 장관(서울대 78학번)의 ‘항소이유서’(1985년 5월27일 작성)에 잘 나타나 있다.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닭장차 : 84년 학원 자율화 조처 이전 학교 안에 상주하던 전경버스. 요즘 ‘이동파출소’로 운용되는 경찰 버스와 비슷한 모습을 한, 같은 크기의 대형 버스다. 시위대의 공격에 대비해 유리창 바깥에 덧댄 철망이 닭장 철망과 흡사하다고 해서 닭장차라는 이름을 얻었다. 평상시엔 교내에 상주하거나 진압작전을 펴는 경찰 병력의 수송 차량으로, ‘상황’이 발생하면 연행한 학생들을 경찰서까지 호송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당시 연행된 학생들은 닭장차에 타는 순간부터 “대가리 박아!” “어떤 XXX가 대가리 쳐들어?!” 등의 폭언을 들었고, 더러 의자의 팔걸이보다 높이 고개를 들었다 진압봉 세례를 받기도 했다.
전경(전투경찰) : 전경의 모습은 지금이나 87년이나 비슷하다. 군화를 신고 두터운 방석복을 입었으며, 방독면을 쓴 머리에는 방석 철망이 달린 검정색 헬멧을 썼다. 정강이에는 땅바닥을 맞고 튀어오르는 돌 따위를 막기 위한 각반을 두르고, 한 손에는 철제 또는 셀룰로이드 방패, 다른 한 손에는 진압봉을 들었다. 방패 대신 최루탄 발사용 유탄발사기를 든 전경도 대열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렇게 소대별 중대별로 정렬해 ‘최전선’에서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1966년 23개 중대 2300명의 직업 경찰관들로 전투경찰이 신설될 때는 ‘대간첩작전’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1968년 북한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기도사건을 겪은 뒤인 1971년 군복무를 대체하는 개념의 전경이 창설됐다. 80년대 중반을 넘어 시위진압 수요가 폭증하자 전경도 급격히 늘어났다. 또 경찰의 치안업무를 보조하는 의무경찰(의경) 제도가 신설됐으나 실제로는 전경과 별 차이 없이 시위 진압에 동원됐다. 전·의경이 가장 큰 규모를 기록한 때는 6월 항쟁이 일어난 87년으로, 한때 5만6천여명에 달했다. 이후 완만하게 줄어들어 현재는 4만1천명(전경 1만6천명 포함)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경찰은 밝혔다.
<87년 상황 관련 용어>
호헌 : 6월 항쟁 때 거리를 메운 시위대가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외친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6월 항쟁 두달 전인 4월13일 담화를 통해 ‘개헌을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연말 대선을 치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은 ‘4·13 호헌조치’라고 이름 붙였다. 전 대통령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인 80년 10월27일 개정해 그때까지 시행되고 있던 제5공화국 헌법은 7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거인단이 간접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장충체육관에 모아놓고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게 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제도였다.
전 대통령은 4·13 담화를 발표하기 전인 3월28일 청남대 회의에서 “직선제도 민주주의이고, 간선제도 민주주의”라며 “(내) 임기가 6개월 밖에 안 남았는데 올림픽 준비를 해야 하고 평화적 정부 이양도 해야 하니 이젠 헌법을 논의할 시간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런 소신을 그대로 밀고 나가 4·13 담화에 이어 6월10일에는 민주정의당(민정당) 전당대회를 열어 자신의 육군사관학교 동기(11기)이자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 당시 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뽑았으나 곧이어 대통령 직접 선출을 바라는 전국민적 저항에 부닥치게 됐다.
<시민·학생운동 관련 용어>
대자보(약칭 ‘자보’) : ‘자신의 주장을 큰 글씨로 써서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뜻의 대자보는 원래 ‘중국산’이다.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와중에 등장했던 대자보가 한국에 ‘수입’된 것은 1984년 이른바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다. 학교 안에 상주하며 교내 시위를 초동 진압하던 사복경찰이 교문 바깥으로 물러나자 그 자리에는 대자보가 나타났다. 언제, 누가, 어디서 가장 먼저 대자보를 붙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서울대가 펴낸 <서울대 50년사>를 보면 “84년 3월20일 서울대에 ‘자유의 벽’이라는 이름의 대자보판이 설치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대나 연세대에도 비슷한 시기에 대자보가 나붙은 것으로 당시 학생들은 기억하고 있다.
대자보는 흔히 ‘모조전지’라고 부르는 A0(94.1㎝x118.9㎝) 크기 종이에 여러 색깔의 매직팬으로 작성한 것이 대종을 이뤘다. 간혹 총학생회나 무슨무슨 투쟁위원회 이름으로 붙은 대자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주요 내용은 정부의 비민주적 행태를 규탄하거나 민주화 투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각종 성명서부터 학생들의 사회과학적 인식 폭을 넓히기 위한 선전물까지 다양했다. 처음에는 단편적인 내용을 담은 1회용 대자보가 많았지만, 나중에는 시리즈물까지 등장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대자보 부착과 철거 문제를 놓고 학교쪽과 학생회가 갈등을 빚은 사례도 있다. 대자보가 늘어나면서 대자보판도 늘어났고, 학생들이 그 앞에 늘어서서 열심히 읽고 있는 풍경은 80년대를 상징하는 대학의 모습이기도 했다.
전조 : 학생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경찰과 맞서던 ‘전투소조’의 준말. 학교에 따라 전조, 영어 컴뱃 셀(Combat Cell)을 축약한 씨씨(CC), 나중에는 선봉대 등으로 불렸다. 84년 학원 자율화 조처 이후 학생과 경찰이 교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거나 거리시위에서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시위대열을 선도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시위 사진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각목을 들고 있거나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은 거의 전조 소속으로 보면 틀림없다.
이들은 특별한 체격 조건을 갖추거나 전투훈련을 받은 집단이 아니었고, 단지 강한 사명감을 지닌 남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가장 앞에 서 있어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체포되거나 부상을 입을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87년 6월9일 학교 앞 시위에서 직격 최루탄에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씨도 그날 전조의 일원으로 시위대열 맨앞에 서 있다 변을 당했다.
주동(자) : 시위를 가장 먼저 시작하는 사람을 ‘주동자’ 또는 줄여서 ‘동’이라 부르고, 그 사람이 시위를 시작하는 행위를 ‘동(을) 뜨다’라고 표현했다. 83년 이전에는 보통 “학우여!” 하는 외마디 구호와 함께 주동자가 유인물을 뿌리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대열을 형성했다. 이렇게 동을 뜬 사람은 경찰의 표적이 되어 연행되는 것은 물론 최소한 군에 강제징집을 당하거나 구속됐다. 84년 이후 학생들의 거리 시위가 잦아지면서 주동자는 흔히 ‘야사(야전사령관)’라고 부르는, 통상 대학 3학년이나 4학년 학생이 많았는데, 이들은 시위를 주동한 뒤 구속되면서 학창 생활을 마무리하고 석방된 뒤에는 노동운동으로 옮겨가는 사례가 많았다. 대학 생활을 그만두는 것을 “학교를 정리한다”고 했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존재이전’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대학 생활을 끝내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사람을 노동운동쪽에서는 ‘학출(학생출신의 약어)’이라고 한 반면 공안당국에서는 ‘위장취업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대규모 대중시위가 벌어진 6월 항쟁 때는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나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회의) 간부 등이 거리시위를 이끌었다.
꽃병 : 화염병을 가리키던 학생운동권의 은어. 화염병을 화염병이라고 대놓고 부를 수 없던 시대 상황의 반영인데, 심지에 불을 붙이면 불꽃처럼 아름답게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거나 꽃병에 꽃을 꽂아놓은 것처럼 심지가 위로 솟아 올라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등 ‘이설’이 다양하다. 언제 처음 사용됐는지는 딱히 기록이 없지만, 당시를 경험한 경찰과 학생들은 대략 84년 하반기쯤 등장한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위협용으로 개발됐으나, 사용 과정에서 진압복에 불이 옮겨 붙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경찰들이 다수 나왔다.
화염병은 빈 소주병이나 사이더병에 휘발유(가솔린)와 시너를 섞어 넣어 만들었다. 병의 4분의 1 정도를 채우는 것이 ‘정량’이고, 휘발유와 시너의 비율은 8 대 2로 섞었다. 병 한가운데 솜으로 심지를 꽂은 뒤 병 입구는 비닐 랩을 씌워 기름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했다. 병 안에는 “화력과 불꽃의 지속성을 높이기 위해 기둥 역할을 할 신문지”를 박아 넣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화염병 시위가 격화되면서 병이나 휘발유를 사지 못하게 하려는 경찰의 감시도 강화됐는데, 당시 화염병을 만들어 봤던 노아무개씨(개인사업)는 “학생들에게 가짜 시너와 휘발유를 파는 업자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택 : 전술을 뜻하는 영어 ‘택틱스(tactics)’의 한국식 줄임말이자 은어로 구체적인 시위 계획과 방법을 미리 짜놓은 것, 또는 그것을 종이 한 장에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을 말한다. 가령 서울 종로5가를 거리시위 장소로 사전에 결정했다면, 거리 시위를 주동할 ‘야사(야전사령관·시위 주동자)’ 등이 미리 그 일대를 답사하면서 시위계획을 짠다. 택에는 보통 △시위를 시작할 장소 △시위 진행 방향과 구간 △구호 △예상되는 경찰 대응과 진압해올 방향 △해산 방법과 퇴로 △시위 장소까지 이동할 교통편과 버스 정류장 또는 지하철역 등이 포함됐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대중적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미리 짜놓은 시위전술은 유용성이 크게 줄었지만, 그 이전 학생 위주의 가두시위는 거의 대부분 사전에 만들어진 택에 따라 진행되었다. 택은 학생운동 조직의 ‘선배’ 학생들을 통해 ’후배’ 학생들에게 은밀히 전해졌는데, 시위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될 때를 대비해 “화장실에서 우연히 봤다”든가 “학회실에서 우연히 구경하고 궁금해서 나왔다”는 식으로 사전에 입을 맞췄다. 택은 ‘치고 빠지는’ 선두적 거리투쟁의 전형적인 시위 전술이었으나, 간혹 전원이 옥쇄를 각오하고 퇴로를 고려하지 않는 ‘몰(歿)택’이 구사되기도 했다.
피(Paper의 머리문자 P) : 대학 구내에 사복경찰이 상주하던 1983년 이전 교내 시위 양상은 짧고 단순했다. 시위 주동 학생이 건물 발코니나 옥상처럼, 경찰이 짧은 시간에 제압하기 어려운 높은 곳에 올라가 군사독재를 규탄하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뿌린다. 그 아래 비밀리에 연락을 받고 모여 있던 학생들이 호응해 대열을 형성하거나 몇 마디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채 몇분이 지나기도 전에 경찰이 사과탄을 던지며 ‘작전’에 나서 참가한 학생들을 잡아간다. 이 때 뿌려진 성명서가 ‘피’다. 시위 과정에서 “피를 뿌렸다”든가 “피를 나눠줬다”는 말은 사람 몸 속을 흐르는 피(血)가 아니라 성명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86년~87년 전동 타자기와 복사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성명서는 일본말로 ‘가리방(かりばん)’이라 부르는, 얇은 기름종이(등사원지)에 철필이나 수동 타자기로 글씨를 새긴 뒤 등사판에 대고 롤러로 밀어 한장 한장 찍어냈다. 엄중하던 시절이라 성명서를 성명서라 부르지 못하고 은어로 대체했던 것이다. 피는 그 표현의 간결함과 은유성으로 인해 이른바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에도 학생들 사이에 성명서를 대체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연와시위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폭로된 직후인 87년 5월23일 서울 종로4가 세운상가 앞에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에 나선 고려대생들이 팔짱을 낀 채 모두 거리에 드러누웠다. 처음 시도된 이 시위 방법에 학생들은 한자 조어로 ‘연와(連臥)’ 시위라고 이름 붙였다. ‘모두가 잇대어 드러눕는다’는 뜻이다. 그 전까지 거리 시위의 양상은 차도를 점거하고 짧은 순간 구호를 외치며 성명서가 담긴 유인물을 나눠주다 진압경찰이 몰려오면 보도블록 또는 화염병 등을 던지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의 주장에는 공감을 해도 방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연행을 각오한 채 경찰의 최루탄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이후 연와시위가 확산되면서 시민들이 학생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고, 진압경찰에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넥타이부대 : 87년 6월 항쟁 당시 시위에 가담했던 무조직 대중, 화이트 칼라 중심의 직장인 시위대를 일컫는다.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질서와 체계는 없었지만, 이들의 참여는 학생 시위를 전국민적 시위로 확산시켰다. 넥타이부대가 최초로 출현한 곳은 명동 일대였다. 6월항쟁 계승사업회에서 펴낼 <6월항쟁 리포트>에 넥타이부대 관련 글을 쓴 정일영(당시 한일투자금융 노조 간부)씨는 넥타이부대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87년) 6월11일에는 경찰에 의해 명동의 모든 골목이 차단되어 점심시간이 되자 일대는 완전 마비상태였다. 명동지역은 금융권의 본사가 밀집돼 있어 점심시간이면 수천 명의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경찰의 제지로 점심식사를 위해 나온 직장인들이 유네스코회관 앞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다. 경찰이 되돌아갈 것을 종용했지만 시민들은 듣지 않고 군중을 이루어 경찰 바리케이드 주위를 꽉 메웠다. 유네스코회관 앞길에 모여 있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사과탄을 터뜨렸다. 조금 밀리는 듯 하던 시민들이 이내 다시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이미 경찰이나 사과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호헌철폐!”를 선창하자 넥타이를 맨 시민들이 “독재타도!”로 응답하며 갑자기 시위대로 돌변하였다. 시민들과 경찰 사이가 다시 좁아지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메아리쳤다. 역사상 최초로 지휘자 없는 넥타이부대의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유네스코회관 앞길은 1시간 여 동안 넥타이 시위부대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교도통신> 특파원으로 6월 항쟁 전 과정을 지켜본 히라이 기자의 증언이다.
“6월 15일 학생들이 (명동성당 농성을) 해산한 날 점심때가 아니었나 기억된다. 명동 입구에서 성당까지 사이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샐러리맨 데모부대가 출현했다.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 광경은 감동적이었다. 명동거리 빌딩의 사무실이나 미장원의 사무직원, 미용사들이 박수를 보냈고, 그중에는 꽃다발을 던지는 여성도 있었다. 서울이 아닌 파리의 풍경 같았다. 그 자리로 전경부대가 투입되어 최루탄을 난사했고,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거기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는 데모대, 하얀 최루가스 연기, 진압에 나선 전경부대, 샐러리맨들의 넥타이. 그러나 넥타이부대의 등장은 확실하게 시민들의 지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 마이크 : 요즘에는 웬만한 시위 현장에도 고성능 스피커가 동원되지만, 80년대에는 그런 호화로운(?) 설비를 기대할 수 없었다. 육성으로는 한계가 뚜렷해 과일장사들이 사용하는 이른바 ‘핸드 마이크’라는 작은 확성기가 쓰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도 인원이 많아지면 역부족이었다. 그 무렵 자연발생적으로 개발된 것이 인간 마이크다. 시위 주동자가 “마이크!”라고 외친 뒤 주장하는 바를 한 소절씩 끊어 말하면, 시위 대열에 참여한 사람들이 입 주변에 두 손을 동그랗게 모으고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큰 소리로 반복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다.
당시 <교도통신> 한국 특파원이던 히라이 기자 눈에 인간 마이크는 신기함 이상의 것이었다. “명동성당 주변에서 매일 데모가 되풀이 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슬로건의 외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금도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인간 마이크’라 불렀던 광경이다. 당시 학생들은 핸드 마이크도 없이 명동 길에 주저앉아서 집회를 열었다. 마이크가 없기 때문에 한사람이 외치면 그 주변에 있는 데모대가 ‘인간 마이크’가 되어 발언자의 발언을 되풀이하였다. 한사람이 ‘최루탄을 추방하라’고 연설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최루탄을 추방하라’고 반복하여, 발언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집회 참가자들이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강희철 전종휘 기자 hckang@hani.co.kr
6월 항쟁 당시 경찰은 삼양화학공업㈜이 제조한 ‘SY-44’(SY는 제조 회사인 삼양화학의 영문 머리문자)탄을 많이 사용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최루탄 특수’를 맞은 이 회사는 한때 매출액이 500억원을 넘었고, 한영자 대표는 87년 28억원의 세금을 내 개인납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루탄이 언제 처음 쓰였는 지는 경찰도 모른다. 다만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98년 9월3일 만도기계 파업 때로 기록돼 있다. “그 뒤로는 쓰인 적이 없다”는 게 경찰의 공식 설명이다. 현재 경찰이 보유하고 있는 최루탄 ‘재고’는 71만여발인데, 80년대의 ‘추억’이 어린 SY-44탄은 재고가 없고 남아 있는 것은 KP-1과 KP-2탄 두 가지 종류라고 한다. 이 수치는 사과탄과 다연발탄(지랄탄)을 모두 합친 규모다.
최루탄의 일종이지만, 크기와 발사방법이 다른 ‘사과탄’
다연발 최루탄으로 불린 ‘지랄탄’
백골단
짭새
닭장차
전경
대자보
꽃병
‘피’로 불렸던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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