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강원대 교수
박세일 교수의 선진화론에 대한 비판
이병천 강원대 교수
많은 사람들이 선진화에 대해 말한다. 마치 한국병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선진화 담론에 따르면,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 다음에 선진화가 과제다. 그런데 선진화 담론은 근래 처음 나온 말은 아니다. 지난 날 김영삼 정부 시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려고 할 때 이 말이 한참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영삼 정부 시기 우리나라는 1996년 12월에 OECD에 가입했고 그래서 선진국이 되었다고 했는데, 가입 약 1년 만에 외환 위기를 맞았다. 졸속적 대외 개방, 또는 이른바 ‘세계화’와 내부 개혁 지체의 비대칭성이 선진화는 고사하고 화를 불러 왔다.
노무현 정부도 선진화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전에는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선진국의 지표로 제시했다. 다시 이제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를 돌진적으로 추진하면서 법, 제도, 관행을 미국식으로 개조하는 것을 선진화라고 주장한다. 김영삼 정부 때와 문맥이 아주 흡사하다. 미국화는커녕 오히려 내가 더 염려하는 것은 중남미화 경향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담론이 매우 특수한, 정치적 색깔을 갖고 있다. 선진화 담론은 민주화 시대에 부응하는 내부 개혁의 과제를 호도하고, 우리안의 사회적 합의 형성 실패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정은 비슷하다.
요즘 나오고 있는 보수 지식계의 선진화 담론은 얼마나 ‘선진화’되었는가. 이론적 체계성으로 보면, 상당 정도 면목을 일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선진화 담론은 산업화, 민주화 다음 선진화라는 그 요란한 일반론이 말이 되는지도 의문이 없지 않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특수한 이념적 성격이다. 이른바 ‘공동체 자유주의’론은 근사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다수 구성원의 공적 사안에의 참여와 그 역동적 활력을 배제하는 탈정치적 보수 정치 담론은 아닌가 싶다.
민주적 평등주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보편적 복지를 구석으로 주변화하는 것은 아닌가. 개방과 경쟁에 대해 과잉 신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의 질, 삶의 질의 선진화없는 선진국이란 과연 어떤 실체를 가질까.
20년전 6월 항쟁 이후 성립한 ‘87년 체제’는 10년만에 ‘97년 체제’에 의해 제압당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97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낳은 ‘두 국민’ 분열의 ‘두개의 대한민국’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 생태적 민주화와 모두를 위한 동반 성장의 길, 세계화의 이익을 활용하되 그 파괴력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사회 통합국가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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