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대가로 ‘감자’ 바라는 사연
도둑질 청년 ‘딱한 처지’ 선처
“감자농사” 약속 몇년째 기다려
“감자농사” 약속 몇년째 기다려
절도 혐의로 구속 기소된 한 청년을 두 차례나 석방해 주고 그 ‘답례’로 청년이 보내주겠다는 ‘강원도 감자’를 기다리는 한 판사의 사연이 24일 서울중앙지법 누리집에 소개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단독 이완희 판사(39·사시 37회)는 몇 해 전 수원지법에서 일할 때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친 혐의로 구속된 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교통사고로 머리까지 크게 다쳐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이 판사는 청년의 앞날을 배려해 집행유예를 선고한 뒤 석방했다. 하지만 그는 석 달도 안돼 다시 수의를 입고 이 판사 앞에 섰다. 또 물건을 훔치다 체포됐고, 공교롭게도 이 판사한테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집행유예 기간 중 범죄를 저지르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실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판사는 청년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편의점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계산대에 있는 돈가방을 집어왔는데, 다음날 다시 그 편의점으로 소주를 사러 갔다가 주인에게 붙잡힌 것이다.
이 판사는 고민 끝에 직권으로 공주치료감호소에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교통사고 당시 머리를 다쳐 충동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기질적 장애가 생겼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는 이 결과를 ‘특별한 사정’으로 간주해 청년에게 징역형 대신 벌금형을 선고했다. 치료감호소에 머물렀던 기간을 벌금으로 환산해 치료감호소를 나오자마자 바로 석방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청년은 “고향인 강원도에 가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다시는 죄 짓지 않고 살겠다. 그 증거로 제가 수확한 첫 감자를 판사님께 한 상자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자는 오지 않고 있다.
이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누리집에 올린 글에서 “요즘도 이따금씩 그 청년이 땀 흘려 수확한 강원도 감자 한 상자를 메고 오는 상상을 해 본다면, 판사로서 너무 큰 대가를 바라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