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사 파견에도 성과없자 고민 깊어져
31일 새벽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한국인 인질 22명 가운데 남자 1명이 추가로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 당국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백종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이 아프간에 머무르는 동안에 설마 추가 살해가 있겠냐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정말 갑갑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정부 당국자들의 얼굴에선 지쳐가는 표정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다. 한 당국자는 “벌써 열이틀째인데, 사실상 중장기 국면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장기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무고한 자국 국민을 살려야 한다’는 국가적 명제와 ‘테러범들에게 굴복해선 안된다’는 국제사회의 규범이란 두가지 ‘지상과제’를 놓고 정부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게다가 인질이 추가로 살해된 상태다. 과제는 무겁고 어렵지만, 해법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
특히 인질 석방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됐던 백종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의 면담에서 가시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은데다, 탈레반 쪽이 다시 협상시한을 설정하는 ‘벼랑끝 전술’을 계속 구사하자 당국자들은 할말을 잃은 듯하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좀 더 긴장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며 “아프간 현지에서도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매우 엄중한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내비쳤다.
이날 오후까지 “백종천 실장이 아프간 현지에서 하루 이틀 더 머물며 협력 방안을 강구하고 있고, 미국과도 필요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조기에 인질 전원 석방을 목표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청와대도 새로운 대응책을 짜야 될 처지에 놓였다.
사실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결정권을 쥔 아프간 정부의 선의에 기대는 것 말고는 우리 정부가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획기적인 카드는 없다. 협상 방식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국제 관례와 달라 정부가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현지 부족 지도자를 거간꾼으로 중간에 두고 탈레반과 ‘간접 협상’을 취하다 보니 효율적이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의사소통 수단도 주로 전화에 의존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안에서는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앞으로) 큰 고비도 있고 작은 고비도 있지 않겠냐”고 말해, 장기화에 대비한 ‘심리적 준비’를 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용인 신승근 기자 yy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