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씨
“일제 피해 떠나온 지 60년 ‘한국인’ 잊은 적 없지”
15살 때 ‘소년항공결사대’ 뽑히자 만주로 피신
‘김구 계열’ 아버지 소개로 독립군 연락원 활동
팔로군·중국 공산당 거쳐 인민군 참전해 ‘부상’
남쪽 귀향했으나 살 수 없어…결혼 않고 여생 7일 오전 9시30분께 중국 베이징 차오양취 왕징의 한 아파트 단지에 차양막을 단 앉은뱅이 자전거 한대가 들어섰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느긋이 발을 구르며 운전대 앞에 달린 녹음기를 튼다. “아리랑~, 아리랑~” 길을 지나던 한 중국인이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한다. 이동희(78·사진) 할아버지의 하루는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중국으로 넘어온 것은 15살 때인 1944년이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 무렵 일제의 소년항공결사대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자신을 자살특공대로 내모는 줄도 모르고, 그는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비행기란 게 오동나무 날개에 엔진을 단 거였지. 기름도 목적지까지만 갈 수 있는 양이었고. 가서 돌아오지 말라는 소리였지.” 입대 날짜만 기다리던 어느날 아버지가 갈 데가 있으니 어서 나와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어찌나 재촉하는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생판 처음보는 아저씨 손에 이끌려 삼랑진역에서 기차를 탔다. 아들이 일제의 손에 죽는 꼴을 볼 수 없어 고민하던 아버지가 자신을 만주로 피신시키려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기차는 하얼빈역에서 섰고, 그는 거기서 다시 무단장(목단강)으로 들어갔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김구 선생을 따르는 독립운동 단체와 끈이 닿아 있었다. 얼마 뒤 무단장에서 백두산으로 옮긴 그는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원이 됐다. 백두산에서 만난 어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네가 그 친구 아들이구나’라며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사선을 넘어야 하는 임무를 떠안은 게 안쓰러운 듯 등을 돌리고 눈물을 훔쳤단다. “백두산 어른들을 모두 ‘아버지’라고 불렀지. 갓쓰고 짚신 신은 어른들이 참 늠름했어.” 중국 대륙이 다 그의 무대였다. 선양, 우한, 난징, 상하이, 쿤밍 등을 오가며 연락원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백두산 아버지’들은 농부 옷을 입고, 그에게 중국 여자옷을 입혔다. 가슴을 솜으로 부풀리고, 달걀바구니를 안은 그는 일제 경찰의 낌새를 채면 병든 아버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딸 행세를 했다. 그렇게 변장하면 백발백중 통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그는 ‘백두산 아버지’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인들에게 애국가와 태극기를 보급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 토비(土匪)들이 수시로 조선인들을 공격했다. 그때 중국 팔로군이 하얼빈에 들어왔다. 조선인들은 팔로군에 편입돼 토비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하얼빈에서 팔로군에 편입된 조선인 가운데 그가 가장 어렸다. 1950년 3월 그는 후난성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에게 조선인민군이 될 것을 명령했다. 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전쟁 분위기가 감돌던 때였다. 그는 포병대에서 두 달 동안 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수류탄 파편에 목과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때 그에게 한 장의 쪽지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김구 선생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박해하고 있으니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장래를 상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 길로 고성으로 달려갔다. 쪽지를 본 아버지는 “네가 살 길은 만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며 흐느꼈다고 한다. 그는 20일 동안 산을 탄 뒤 다시 백두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왕징 근처에서 홀로 살아간다. 자신이 겪었던 삶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 결혼도 하지 않았다. ‘백두산 아버지’들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자전거를 몰고 아리랑을 들으며 소일한다. “내가 중국에서 60년 넘게 살았지만 한 번도 한국인이란 걸 잊은 적이 없다.” 중국인 친구들은 그를 ‘진짜 조선 사람’이라고 부른다. 베이징/글·사진 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김구 계열’ 아버지 소개로 독립군 연락원 활동
팔로군·중국 공산당 거쳐 인민군 참전해 ‘부상’
남쪽 귀향했으나 살 수 없어…결혼 않고 여생 7일 오전 9시30분께 중국 베이징 차오양취 왕징의 한 아파트 단지에 차양막을 단 앉은뱅이 자전거 한대가 들어섰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느긋이 발을 구르며 운전대 앞에 달린 녹음기를 튼다. “아리랑~, 아리랑~” 길을 지나던 한 중국인이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한다. 이동희(78·사진) 할아버지의 하루는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중국으로 넘어온 것은 15살 때인 1944년이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 무렵 일제의 소년항공결사대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자신을 자살특공대로 내모는 줄도 모르고, 그는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비행기란 게 오동나무 날개에 엔진을 단 거였지. 기름도 목적지까지만 갈 수 있는 양이었고. 가서 돌아오지 말라는 소리였지.” 입대 날짜만 기다리던 어느날 아버지가 갈 데가 있으니 어서 나와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어찌나 재촉하는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생판 처음보는 아저씨 손에 이끌려 삼랑진역에서 기차를 탔다. 아들이 일제의 손에 죽는 꼴을 볼 수 없어 고민하던 아버지가 자신을 만주로 피신시키려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기차는 하얼빈역에서 섰고, 그는 거기서 다시 무단장(목단강)으로 들어갔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김구 선생을 따르는 독립운동 단체와 끈이 닿아 있었다. 얼마 뒤 무단장에서 백두산으로 옮긴 그는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원이 됐다. 백두산에서 만난 어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네가 그 친구 아들이구나’라며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사선을 넘어야 하는 임무를 떠안은 게 안쓰러운 듯 등을 돌리고 눈물을 훔쳤단다. “백두산 어른들을 모두 ‘아버지’라고 불렀지. 갓쓰고 짚신 신은 어른들이 참 늠름했어.” 중국 대륙이 다 그의 무대였다. 선양, 우한, 난징, 상하이, 쿤밍 등을 오가며 연락원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백두산 아버지’들은 농부 옷을 입고, 그에게 중국 여자옷을 입혔다. 가슴을 솜으로 부풀리고, 달걀바구니를 안은 그는 일제 경찰의 낌새를 채면 병든 아버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딸 행세를 했다. 그렇게 변장하면 백발백중 통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그는 ‘백두산 아버지’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인들에게 애국가와 태극기를 보급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 토비(土匪)들이 수시로 조선인들을 공격했다. 그때 중국 팔로군이 하얼빈에 들어왔다. 조선인들은 팔로군에 편입돼 토비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하얼빈에서 팔로군에 편입된 조선인 가운데 그가 가장 어렸다. 1950년 3월 그는 후난성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에게 조선인민군이 될 것을 명령했다. 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전쟁 분위기가 감돌던 때였다. 그는 포병대에서 두 달 동안 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수류탄 파편에 목과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때 그에게 한 장의 쪽지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김구 선생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박해하고 있으니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장래를 상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 길로 고성으로 달려갔다. 쪽지를 본 아버지는 “네가 살 길은 만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며 흐느꼈다고 한다. 그는 20일 동안 산을 탄 뒤 다시 백두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왕징 근처에서 홀로 살아간다. 자신이 겪었던 삶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 결혼도 하지 않았다. ‘백두산 아버지’들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자전거를 몰고 아리랑을 들으며 소일한다. “내가 중국에서 60년 넘게 살았지만 한 번도 한국인이란 걸 잊은 적이 없다.” 중국인 친구들은 그를 ‘진짜 조선 사람’이라고 부른다. 베이징/글·사진 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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