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체육시간에 피구놀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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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초딩들에 ‘일기검사’물어보니 “어른들은 몰라요” 여러해전(1991년)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어른들은 몰라요>란 어린이연속극이 있었다. 그 드라마의 주제곡은 이랬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우리가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어른들은 몰라요./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주면 그만인가요/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마음이 아파서 그러는건데, 어른들은 몰라요.아무것도 몰라요./알약이랑 물약이랑 소용있나요/언제나 혼자이고 외로운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세요. 사랑해주세요 이번에 초등학생 일기 감독을 둘러싼 논란에 초등학교 현장을 찾은 기자는 이 노랫말을 다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일기? 그까이꺼 뭐, 특별한 것두 없는데 보나 안보나…”무슨 상관? 국가인권위원회가 7일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는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교육인적자원부에 이를 개선하라는 의견을 냈다. 교사와 학부모 등 ‘어른들’은 “(교사의 지도로) 글짓기 실력이 향상된다” “학생의 환경과 고민을 파악해 생활지도를 할 수 있다”며 일기장 검사가 ‘필요하다’고 반발했다. 어른들 가운데는 인권위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기를 ‘쓰고 검사받는’ 당사자인 아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쓰는 사람, 검사받는 사람이 가장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거 아닌가? 기자는 호기심을 품고 8일 서울 시내 초등학교 두 곳을 찾아 아이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봤다. 일기 검사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은 크게 세가지였다.
1) “선생님이랑 대화할 수 있고 글솜씨도 늘어서 좋아요”
2) “‘초딩들’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일기 감독이라니요”
3) “일기? 그까이꺼 뭐, 특별한 것두 없는데 보나 안보나…” 취재를 나가기 앞서 생각하기론, 대부분의 아이들이 2번의 입장에서 목에 핏대를 세울 줄 알았다. 하지만 1번 의견이 적지 않았고, 1, 2번 사이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ㅇ초등학교 5학년 최아무개(12)양은 “답답한 마음을 일기에 표현하면 선생님이 위로를 해주거든요. 선생님 생각도 알 수 있고 좋은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3학년 때 ‘부모님이 싸워서 싫다’고 일기에 썼는데 선생님이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서 집안 분위기가 좋아졌거든요. 선생님이 학생 일기를 보면서 그 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ㄱ초등학교 4학년 송아무개(11)군은 ‘좋았던 추억’까지 들이댄다. “부부싸움 썼더니 선생님이 엄마아빠한테 전화해서 화해시켰어요” 그런데 세상에는 이들처럼 ‘마음이 활짝 열린’ 아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숙한 아이들은 ‘감추고 싶은 비밀’ 몇개씩은 가지고 산다. ‘초딩’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ㅇ초등학교 6학년 남궁아무개(13)양은 “선생님이 일기 본 뒤에 고민 상담도 해 주고 좋은 점도 있지만 내 비밀을 본다는 점은 싫어요”라며 운을 뗐다. “일기장에는 알려도 되는 고민만 털어놔요. 선생님이 봐도 될만한 것들…비밀 일기장을 따로 쓰거든요.” 솔직한 고백이 이어진다. 박아무개(9)군도 대한민국 초등 2학년의 수준을 드러낸다. 박군은 “글쓰는 실력이 느니까 좋긴 한데요, 고민 상담은 안 해주고 그냥 도장만 찍어줘요”라고 선생님들의 ‘직무태만’을 꼬집는다. 아이들은 “일기 감독 때문에 깊이있는 얘기를 못쓰겠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엄마 아빠한테도 일기장 안 보여주는데요. 선생님한테 어쩔 수 없이 보여줘야 하잖아요. 일기를 형식적으로 쓰게 돼요. 꼭 일기 감독해서 생활지도해야 되나요? 1대1 상담도 있는데….” 6학년 오아무개(13)군의 뼈있는 지적이다. 5학년 서아무개(12)양은 “선생님이 보니까 일기 내용을 지어서 쓸 때도 있다”고 귀띔한다. 어른들은 ‘글짓기효과·생활지도’와 ‘인권침해’ 두고 논란 아이들은 “이건 숙제일뿐…거긴 고민과 진짜 생각을 쓰는 데가 아니죠” %%990002%%
아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일기 감독에 반대하지 않는 아이들조차 ‘3급 비밀’정도만 일기에 쓴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그마저 없다. 이 지점에서 어른들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생긴다. ‘아이들한테 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일기감독이 인권침해”라는 인권위의 결정에 사회가 이렇게 떠들썩하다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일기에 적잖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얘기다. “일기는 이제 ‘숙제화’됐다고 보면 돼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고민같은 거 거의 안 쓰죠. 혼자 마음에 담아두는 경우가 많구요, 요즘은 미니홈피에 일기장 만들어 놓고 써요. 일기 감독이 교육효과가 있을까요?” 6학년 진아무개(13)군의 말이다. 강아무개(13)군도 “일기장에 특별한 거 쓰는 것도 아닌데 검사해도 상관 없을 거 같은데요”라고 거든다. 세가지 답변 유형 가운데 3번, “일기? 그까이꺼 뭐, 특별한 것두 없는데 보나 안보나…”에 해당된다. “어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는 ‘초딩들’의 세계가 있다” 인터뷰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어른들은 죽었다 깨나도 알지 못하는 ‘초딩들’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어른들은 교육효과냐 인권이냐를 놓고 다투지만, 아이들의 말을 보면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기를 통해 생활지도를 할 수 있는 여지가 그리 크지 않은 셈이다. 적은 부분이라도 생활지도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면 그게 어디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지만. “알리고 싶지 않은 내용은 종이로 가리라고 해요. 왕따같은 문제도 일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고 글짓기 실력도 늘잖아요. 뭐가 나쁘죠?”(강아무개(40) 교사) “아이들과 마음깊이 만날 수 있어요. 교사들은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헌신적 배려를 하고 있어요.”(김아무개(53) 교사) 선생님들의 ‘헌신적 배려’와 일기 감독이 가져올 ‘교육적 효과’를 무시할 순 없다. 다만, 아이들의 일기장은 ‘앙꼬 빠진 찐빵’이고 요즘 ‘초딩들’은 어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엉뚱하지만 현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밀 일기장과 ‘미니홈피’에 그들의 고민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을 줄이야.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영인 기자 soph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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