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은 26일 올 한 해 수사한 사건 중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안타깝고 황당한 사건들을 선정해 발표했다.
■ ‘20대 그녀’에겐 안타까운 사연이…=20대 남성 ㄱ아무개씨는 온라인 게임을 하다 알게된 20대 여성 김아무개씨에게 호감을 느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길 나눈 적은 없었지만 서로 사진도 주고받고 전화를 통해 속내를 털어놓으며 연인 사이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ㄱ씨는 “스키장에서 사고가 나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김씨의 전화를 받고 86만원을 송금했으나 그 뒤 연락이 끊겨버렸다. 결국 ㄱ씨는 김씨를 사기죄로 고소했는데 검찰 조사 결과 놀랍게도 김씨는 20대가 아닌 46살 유부녀로 20대 딸의 엄마였던 사실이 드러났다.
김씨의 사정은 이랬다. 김씨는 남편과 함께 웨딩사업을 하다 빚을 지고 특경가법의 사기 혐의로 수사기관과 사채업자에게서 쫓기는 몸이었다. 게다가 김씨의 남편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김씨는 “인터넷게임을 하면서 얻은 아이템을 팔면 하루에 2~3만원은 벌 수 있다”는 조카의 말을 듣고 인터넷게임을 배웠고, 전략게임의 특성상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아이템 얻기가 쉬워 딸의 인적사항을 이용해 게임과 채팅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던 여자친구가 40대 중반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ㄱ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파 누워있는 남편 옆에서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젊은 남자와 연인처럼 통화를 해야했던 김씨의 사연도 안타깝진 마찬가지. 결국 김씨의 남편은 김씨가 다른 건으로 구속되어 있던 중에 세상을 떠났고 서울동부지검은 김씨의 범행 동기 등을 헤아려 벌금 30만원의 약식명령을 청구했다.
■ 가짜 CIA요원을 속인 가짜 검사=한아무개씨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동아시아 담당관을 사칭해 경남 지역 조선업체 경영자 등을 상대로 “해외펀드 투자를 지원해 주겠다”고 속여 19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특경가법의 사기)로 구속됐다.
한씨의 아내 ㄴ아무개씨는 남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던 중 ‘부산지검 검사’라는 최아무개씨를 만났다. 최씨는 ㄴ씨에게 “남편의 죄질이 안 좋으니 검사들과 판사들에게 접대를 해야 한다. 기자들에게도 로비를 해 보도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ㄴ씨에게 돈을 요구했다. ㄴ씨는 말끔한 양복차림에 절제된 말과 행동을 하는 최씨를 진짜 검사라고 믿고 8회에 걸쳐 7510만원을 건넸다.
하지만 부산지검 검사 중엔 최아무개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최씨는 ‘가짜 CIA 요원’을 감쪽같이 속인 ‘가짜 검사’였던 것이다. 부산지검 특수부는 지난 3월 ‘뛰는 CIA 위에 나는 검사’가 있는 것을 몸소 보여준 최씨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 내연녀 딸까지 성폭행한 파렴치범=김아무개씨는 내연관계인 여성의 딸 ㄷ씨가 ㅇ대학 항공운항과에 지원했다 떨어진 사실을 알고 ㄷ씨에게 전화를 걸어 “면접 때 보고 마음에 들었다. 벗은 몸을 보여주면 합격시켜주겠다”고 구슬렸다. ㄷ양은 김씨 지시에 따라 어두운 골목에서 몸을 드러냈고, 김씨는 멀리서 몸을 숨긴 채 ㄷ씨의 나체 사진을 찍었다.
김씨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씨는 다시 ㄷ씨에게 전화해 “40~50대 남자와 성교하는 장면을 보내지 않으면 사진을 인터넷에 퍼뜨리겠다”고 협박하며 “주변에 그 나이대 남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교묘하게 ㄷ씨가 자신을 떠오르게 만든 김씨는 ㄷ씨로부터 전화가 오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나도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하는 대로 해주자”며 ㄷ씨와 성관계를 맺었다. 김씨는 그 후에도 “그 교수가 이젠 나까지 협박해 동영상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말해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이런 김씨는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사태를 의심한 ㄷ씨의 신고로 끝을 맺었고, 서울남부지검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김씨를 구속 기소했다.
■ 도심 속 ‘로빈슨크루소’ 가족=강원도 원주에 사는 성아무개(40)씨는 마당에서 폐품을 태우다 화재신고로 오인해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공사 소음이 시끄럽다며 집 옆 사무실 유리창을 부순 사건을 구속됐다. 그런데 성씨의 행동이 이상했다. 구속된 뒤 일체의 진술을 거부한 성씨는 손으로 밥을 먹고 그 자리에서 볼일을 보는가 하면 자신의 변을 바닥에 뿌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 경찰서 유치장 생활 3일만에 검찰로 송치됐다.
성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없으면 집에 있는 노부모가 밥도 못 먹는다”는 말을 했다. 이에 검찰이 성씨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보니 성씨를 포함한 일가족 4명이 5년 넘게 외부와 왕래를 끊은 채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서 나뭇가지로 불을 피우고, 교회에서 나눠준 쌀로 죽을 끓여먹으며 연명한 사실을 목격했다. 성씨의 노부모는 모두 치매에 걸린 상태였고, 남동생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씨 아버지가 주택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호 대상자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심층 상담 결과, 성씨는 공고를 졸업한 뒤 한국전력에 특채돼 10여년간 근무하면서 o대학 영문과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씨는 그후 목사가 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다 종교적인 고민으로 정신이 이상해져 비정상적인 증세를 보인 것이었다. 성씨의 아버지는 소유한 전답이 원주시의 택지개발 과정에서 수용당하자 정신이 이상해졌고,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5년 이상 움직이지도 못하고 골방에 누워지내오고 있었다.
성씨 가족의 딱한 사정을 알게된 춘천지검 원주지청은 성씨의 구속을 취소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어머니를 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받을 수 있게 했다고 밝혔다. 또 동사무소에 알려 성씨 가족이 차상위계층으로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성씨로부터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고 조만간 직장을 구해 부모님을 부양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전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