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언어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시와 소설과 같은 순수문학에서부터 소위 문자로 기록된 일부 문학들이 떠오른다. 내게 가장 고급스러운 언어로 인식되는 것은 소설가 오정희의 소설들이다.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주옥같은 언어로 만들어져있다.
김억과 같은 시인도 떠오르는데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물론 현대 시인중에도 가끔 가다 그런 시인들을 볼 수 있다.
철학적인 언어나 종교적인 언어도 때로는 아름다움이 보인다. 역시 정제된 언어들이다.
그렇다면 저질한국어도 있을까?
아마 인터넷 상에서 떠오르는 말들 중 90%는 이런 언어들일 것이다. 가벼운 언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언어들은 우리 청소년들의 모바일폰의 문자메시지에도 상당히 있다. 일상적인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 게임 속의 언어,채팅용어, 게시판 용어들도 상당히 이에 속한다. 나역시 이러한 용어를 가끔 사용한다. 쓰고나서는 후회한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참아야 했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먹어 싼 사람들의 뻔뻔한 태도를 보고 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아름답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더더욱 잔인한 말을 써대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다는 편이 낫다.
소위 자판전투인-키보드 워리어들이 이러한 저급한 언어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종대왕은 과연 그 자신이 만든 한국어가 이렇게 쓰일줄 알았을까?
그의 업적은 정말 기본만 배우면 누구나 글자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유럽인들도 더 깊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라틴어를 배우거나, 전문적이며 학술적인 용어를 더더욱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네들의 언어의 어려움은 단순히 철자의 문제가 아니라-영어알파벳도 우리의 알파벳만큼이나 쉽고 간단하고 읽기 편하지만 용어의 깊은 뜻은 더더욱 깊은 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글을 배우지만 이 한글에도 일본어, 중국어, 영어 등 다양한 문화가 접합되면서 깊은 의미를 갖는 글을 쓰거나 읽는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은 되지 못한다. 우리 중고생들 중에 은유라는 말의 정확한 뜻을 밝혀보라고 하면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숨길 은에 깨달을 유 즉 숨겨져있는 깨달음을 주는 법이라는 의미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고보면 중고등학교의 언어는 깊이가 얕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깊은 철학적 깊이를 가진 언어를 그저 문제풀이용으로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철자가 끝 궁에 끝 극자임을 아는 학생은 대체 얼마나 될까?
그렇게 깊이 있게 가르치지 않으면서 그들의 능력치만은 거대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위의 누각과 같은 것이다. 하나하나의 용어가 이렇듯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빠른 문제풀이와 빠른 의미전달만을 가르치다보니 인터넷 용어 역시 비슷한 길을 간다.
대체 언어란 무엇인가? 의미인 기의와 표시인 기표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가? 라캉은 기의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기표만 존재한다고 했다. 즉 다른 것을 가리키기만 하는 것이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깊이는 파고들면 들수록 끝이 없는 것이다. 하나의 화두만으로도 평생을 연구해야 한다는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언어는 그렇다.
가벼운 언어는 깊이가 없다. 그들은 기의니 기표니 하는 것도 없다. 오로지 겉에 드러난 것에만 의미를 둔다. 가벼운 토크쇼나 쇼프로그램, 몸개그나 직설적인 토론, 의미없이 웃기려는 행동으로만 이루어진 프로그램, 포르노그라피, K1, 게임용어 등은 그렇게 깊이 없는 우리네 언어생활의 단면을 이루고, 보여주고, 악화시킨다.
깊이 없는, 성찰없는 언어는 인간을 단순화 시킨다. 일차원으로 전락시킨다. 몸의 안위와 편안만으로 살고, 순간적인 것에 몰두하게 만든다. 결국 그런 인간은 왜 자신이 사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게 된다. 깊이없는 인간으로 가득찬 맹목적 군중만이 모이게 된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즉흥적으로 헤어지고, 결혼하고, 살인을 하기도 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바로 깊이 있는 언어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준 것이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동서를 묶어주었고 남북을 이어주었다. 물론 중앙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고, 유교적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7살짜리 아이가 더듬더듬 읽을 수 있게 해주었고, 시장통의 언어와 사색하는 언어를 구분시켜 주었다.
그러나 인텔리는 한자와 영어로 말하고, 그것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못 배운 사람들-중고생도 아직은 이 범주안에 들어가는데-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한글로 적었다. 우리의 의사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것이다. 즉 세종대왕은 계급간의 소통까지는 후세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소위 인텔리는 상종못할 사람들의 언어를 쓰지 않고, 소위 평범한 사람들은 상류층의 언어를 가져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소위 문명화과정이라는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의 문화가 하류계층으로 전달되는 평범한 과정이 없이 바로 일본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위 고급문화의 향유자들이 가지고 있던 일부 긍정적인 면-형이상학적 면은 모두 버려지고 해방 후에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대열을 따라 위와 아래가 동시에 달려갔다.
결국 우리 한국어는 최대 유통자인 신문과 방송에서 버려놓았고, 교과서의 언어는 따로 놀고 있으며, 일상언어와 인터넷언어가 구분되고, 세대간도 나뉘어져 있다. 반목과 불신만이 우리의 언어에는 가득하다.
이건 말하자면 같은 영어알파벳을 쓰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유럽 각 국가와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유럽이 미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한국어 언어 사용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인끼리 말이다. 심지어 일상언어와 교과서도 괴리상태이니 뭐 말할 것이 있을까? 대학교의 언어와 고등학교의 언어가 다르고, 국회의원과 기업의 언어가 다르다. 대통령과 서민의 언어가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언어가 다르다.
책과 방송과 일상언어와 정치언어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이상 저질한국어를 쓰지 않고, 이념과 생각이 달라도 최소한의 소통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소위 글쟁이로서 해야할 일들을 떠올리면 참 피곤하다. 그건 아는가? 현실언어와 신춘문예와 같은 문학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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