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공포물 ‘미스트’ 개봉
[미스트]의 줄거리는 아주 심플하다. 거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산에서 거대한 안개가 밀려온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온 사람들은 그 안개와 함께 온 괴물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그 안에 고립된다. 이후 일부는 괴물에 의해, 또 일부는 마트 안의 사람들에 의해 죽고 죽이는 일이 생기고, 사람들은 절망한다. 주인공 일행은 종래에 마트를 나와 차를 몰고 떠나지만,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안개 밖으로 벗어나지도, 생존자를 만나지도 못하면서 자살을 선택한다. 하지만 총알이 모자라 살아남은 한 사람이 괴물을 향해 자포자기의 일갈을 외칠 때,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면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괴물들을 진압하면서 진군해오는 군인들이다.
영화 전개 내내, 사람들은 마트 내부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서로를 돕기도 하고, 함께 미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안좋아지면서 초월자에 대해 기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희생양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상황이 열악해지자, 그 열악한 상황을 떠안고 갈-떠안고 갔으면 하는- 희생양에 대한 혈안은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까지 심각한 질문을 남긴다.
일부 영화평에서는 [미스트]의 결말을 놓고 찬반론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후에] 이후 접해본 결말 중 가장 강렬하고 예상을 깨는 결말이었다. [미스트]의 결말은 그저 마지막에 주인공이 목도하는 것이 '괴물이 아니었다네' 뿐이 아니라 '그것은 안개가 아니었다네'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시야를 가리는 존재를 안개로 칭하고 그 안개를 미지의 존재가 몰고 온 것이라 믿으면서,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안개는 절망이 된다. 그래서 [미스트]의 이런 결말은 정작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미지의 괴물이기보다 스스로 완강하게 믿어버린 절망이었슴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일 뿐더러 예상하지 않았던 결말이나 충분히 납득가능한 상황인 관계로 보는 이를 당황시킨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트 안의 사람들은 안개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시야를 가리는 존재는 초반부 부터 '안개'로 명명된다. 그리고 안개는 미지의 공포가 물러가는 징조가 아니라 미지의 공포가 밀려오고 머물러 있다는 상징이 된다. 그래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되는 안개는 안개 너머의 미지의 존재와 대적할 의지를 상실시킨다. 그래서 마트 안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명명한 안개에 절망하면서 그 안개 너머와 싸우는 대신, 확인하지도 못한 안개 너머의 존재에 복종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종래에 그들을 안개 안에 있게 한 신에게 의존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아무리 신의 뜻을 인간이 가늠하기 어렵다고는 하나 납득할 수 없는 공포와 가해를 만들어낸 신에게,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도록 의지한다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 마트 안에서 그것이 안개가 아니라 괴물을 섬멸해오는 군대의 연기라고, 즉 미지의 존재들이 물러가는 징조라고 이야기가 되었더라면, 그래서 애초에 사람들의 안개에 대한 전제가 안개가 아닌 연기라고 합의되었더라면, 인물들이 맞는 귀결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은 현실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은 자명하며, 그렇다면 애초에 시나리오가 구성되기도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대선을 통해서 '경제대통령'이니 '착한대통령'이니 하는 슬로건이 사람들의 의식을 얼마나 대단하게 장악하는지를 경험한 바 있다. 경제가 어렵다는 어떤 '확성기'의 외침은 정말 경제가 어려운지, 우리로 하여금 경제가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그래서 실제로 어떤 후보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합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담론하는 대신에 그저 '경제가 어렵다'는 맹목적 믿음을 확산시킴으로써 '경제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혹은 집단 히스테리로 이어졌다. 그 안에는 [미스트]의 마트 안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덩달아 그렇게 생각하고 동조해야 할 것같은 관념의 전염성이 존재했는데, 영화와 마찬가지로 문제해결에 대한 대안이나 방법을 찾는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싶은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을 양산했다. 영화를 보거나 그런 대선을 지켜보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험해 보이는 일이지만, 영화 안에서 안개가 안개로 명명된 순간 사람들에게는 딱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느껴진 것처럼, 대선을 치르는 동안의 우리 국민들이 느낀 경제라는 안개는 그것에 대해 호언장담하는 의지처를 갈구하게 하고 믿고싶도록 만들었다. 다가오는 어려움 혹은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라고 외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난관의 징조로 여겨지는 현상이 정말 그런 징조인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일인데, 그것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늘상 간과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위 안정된 직장이라고 여겨지는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미스트]의 공포와 본질의 문제는 고스란히 적용된다. 가령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직원들은 움츠러들고 방황한다. 2005년에 회사의 일부 사업부가 분사됐다. 한마디로 다른 회사가 됐다는 뭐 그런 말인데, 이 과정에서 연구원이나 생산, 영업사원 등등 그 사업부의 일을 수행하던 직원들은 세가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하나는 분사회사로 따라가는 것, 또 하나는 회사에 남는 것, 나머지 하나는 명예퇴직을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그 세가지 중 꼭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무척이나 동요했다. 그 바탕에는 회사에 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회사가 (자신들이) 남는 걸 원할 것이냐'를 고민하고 분해 하면서도 정작 회사를 나가게 되면 실직과 저임금, XX맨이라는 신분이 상실될 것에 대하여 두려워 하였고, 그러나 종래에는 그 고민을 하느라 마셔댄 술값이 무색할 정도로 대게는 어떻게든 회사에 잔류했따.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 웃긴 것이, 모여앉아 그런 말을 하던 우리 중에는 정작 회사 밖에 나가 살아본 사람이 없었고, 퇴사하고 회사 근처에 고깃집을 시작한 누군가가 홀라당 망했다더라는 루머만이 안개 밖에 기다리는 괴물처럼 우리의 머릿속을 꾹 누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개 밖에서의 생존여부를 왈가왈부하는 것도 그렇지만, 회사와 회사밖의 경계를 이루는 안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불안감이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공고해져서 그 안개 밖으로 내쳐지지 않기 위해, 지레 무릎꿇고 사는 모습은, 사실 이렇게 우리 사회 도처에 깔려있는 범상이다.
그래서였을까? [미스트]가 결말을 향해 치달아 가는 과정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 과정이나 결말은 참담할 지언정, 그 강렬함이나 불편함은 기실 영화가 우리 삶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대운하에, 태안 기름 유출에, 삼성 비자금, ..그리고 내가 회사를 버텨내고 있는 상황까지, 최소한 내가 對사회적으로 느끼는 공포는 기실 어떤 실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맞닥드리고 싶지 않은 어떤 파국에 대한 전제다.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마음이 불안하고 무거웠던 것은 내가 살아야 할 사회나 또 내 개인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여, 이미 현재의 불투명한 상황을 '절망의 전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설령 한치 앞도 예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만날 것이 나를 해칠 괴물일지언정, 내가 또 우리가 미리 절망할 필요가 있겠는가를 다시 질문하게 됐다. 그래서 안개 밖은 다시 안개의 연속이고, 그래서 달리다 보면 안개 밖으로 나가질지 괴물앞에 멈출지 모르지만, 그래도 안개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고 달릴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달려나가봐야 한다는 대답을 스스로 내려볼 수 있었다.
결말의 파국으로 분분했던 [미스트]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대답을 들이미는 공포영화다. 그러나 그러함으로써 미리 절망할 필요도, 미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슴을 역설하는 기실 아주 건강한 영화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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