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종합반 개강을 앞두고 지난 2월 서울 노량진 학원 밀집 지역에서 학원 쪽에서 고용한 도우미들이 수강생 유치를 위한 판촉전을 하고 있다.
큰 녀석이 읽던 책을 손에 든 채 인사한다. 아내는 주방에서 고개 내밀며 살짝 밥주걱을 흔든다. 막내가 보이지 않는다. 방에 가보니 엠피쓰리를 귀에 꽂고 고개를 흔들며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아빠의 기척을 느꼈는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어머니는 아직 안 오셨느냐 물으니 막내딸네 가셨단다. 오붓하게 네 식구 둘러앉은 식탁에 불빛도 따뜻하다. 홀로 남으신 어머니 그나마 건강하셔서 인근의 막내네 집에 마실 다니시고 노인정 십 원짜리 민화투에 열중하시기도 한다. 아이들도 성격 평평하게 잘 자라주니 다행이고 살뜰한 아내도 항상 고맙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허나 이 행복은 임시적이다. 수험생인 큰 녀석은 재수하겠단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집안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던 연말을 보내고 몇 군데 시험도 떨어진 후 오히려 안정을 찾았다. 어차피 재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편안하게 쉬겠다는 뜻이다. 전전긍긍 밖에도 나가지 않던 아내도 조금씩 웃음을 되살린다. 이러저러 눈치만 늘던 막내까지 영화 보러 가자는 둥 예전의 분위기를 다시 꺼낸다. 다들 고맙다. 이래서 가족이라 하는 모양이다. 직장이 확실해도 언제 구조조정이니 뭐니 칼바람이 불지 모르는 판국에 한 해라도 일찍 대학에 가야 학비보조라도 받겠거니 싶었던 내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진다. 일시적이지만 우리 가족은 지금 행복하다. 다가올 긴장을 예견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서로를 위해 웃음을 보여준다. 이대로 행복을 지속할 순 없는 것일까.
대학을 가야하고, 어떻게든 명문대를 가야 주류사회에 편입 가능하고, 그나마 나은 삶을 살겠거니 하는 내 마음을 탓하고 싶지 않다. 열아홉 시절 학습능력이 평생의 프리미엄이 된다면 그건 잘못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여전히 비타협적이다. 좋은 직장, 더 많이 받는 일자리는 하나같이 명문대 출신을 우대한다. 조금 더 받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지만 부모 입장에서 아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인간 됨됨이가 먼저라는 식의 논리는 촌스럽다. 그건 당연한 품성이니까.
아이들의 평화로움을 지켜주고 싶다. 어린 자식들이 걱정 없이 따뜻한 저녁상에 둘러앉기를 바란다. 등에 한 아름 졸음을 짊어지고 새벽학원에 가는 뒷모습도 더는 싫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이의 성적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는 아내는 이제 없었으면 한다. 허나 이 모두가 올 가을 수능시험 이후에 판가름 난다. 평평한 세상을 꿈꾸지만 난 여전히 귀퉁이의 월급쟁이일 뿐이다. 가난하면 어떠냐고 북돋울 자신도 없다. 내 자신이 지겹게 가난한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입시제도가 도금(鍍金)해 준 행복이다. 잠시 가불해 온 행복인지도 모른다. 다음 달이면 다시 학원에 나가야 하고 살얼음판 디디는 수험생 가족이 되어야 한다. 입시제도가 달라진다니 이제 중3 되는 막내는 조금 편해질까 기대하지만 그 역시 만만찮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기다리느니 우리 가족이 먼저 변하는 게 현명한 방법 아닐까 싶다. 아비로서의 이율배반도 덜어내야 행복이 가까워질 테니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