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잡이형·자기부정형·읍소형·정면돌파형
출두 작전도 가지가지…기자들 우왕좌왕
출두 작전도 가지가지…기자들 우왕좌왕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을 수사하는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활동에 들어간지 20일이 지났다. 그동안 차명 의심계좌를 보유해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된 삼성 계열사 임원과 실무자는 줄잡아 20여명. 소환된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이들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삼성 쪽 ‘작전’도 다양했다.
바람잡이형=지난 18일 오전 10시께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자리한 서울 한남동 특검팀 건물 1층 출입구에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50대 남성 2명이 나타났다. 일순 술렁이기 시작한 취재진들. 이 가운데 한 명이 ‘거물급’ 소환 대상자인 황영기(56) 전 삼성증권 사장과 얼굴 생김새가 매우 닮았던 것이다. 취재진 30여명이 우르르 몰려가자 이들은 2층 현관을 통해 한남대교 반대 방향인 한남오거리 쪽으로 취재진을 이끌고 나갔다. 이들은 기자들의 질문에 웃기만 할 뿐 ‘묵묵부답’. ‘묻지마 투자’로 주식형 펀드에 돈이 몰리듯 취재진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특검 수사가 시작된 뒤 삼성 임원으로는 처음으로 소환된 성영목(52) 호텔신라 사장이 변호인과 함께 나타났다. ‘뻥’ 뚫린 2층 현관을 여유롭게 통과한 성 사장은 여유있게 특검팀 사무실로 올라갔다. 1·2층 출입구, 단 두 곳만 막으면 취재진 몰래 소환자가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던 ‘난공불락’의 취재망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뒤늦게 알려졌지만, 황 전 사장은 당시 경기도 어딘가에 있었다고 한다. 취재대상을 놓쳐 허탈해진 취재진들은 “‘유사 황영기’에게 속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기부정형=‘철통 취재망’이 그렇게 무너지고 6시간 뒤. 1진 기자들에게 ‘깨지고’ 분을 삭이지 못하던 취재진 10여명이 대기하고 있던 특검팀 건물 2층 출입구로 변호사와 함께 50대 남성이 또다시 들어섰다. 취재진들이 다가오자 변호사는 “3층 갑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특검팀이 있는 건물 3층에는 건물 주인이 운영하는 방수재 회사 사무실이 있다. 이미 한 차례에 속았던 취재진들로서는 한남대교 밑을 흐르는 한강을 뒤로 하고 ‘더 이상 속을 수는 없다’는 배수진을 폈다. 계단을 통해 3층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려던 이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몰려든 취재진에 막히자, 그제서야 “삼성증권 부장급 실무진이다. 참고인 자격으로 왔다”고 실토했다. 이들은 특검팀 건물의 구조와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읍소형=23일 윤부근(55) 삼성전자 부사장이 특검팀에 나오기 전 삼성 쪽 변호사는 취재진에게 이전과는 달리 “윤부근 삼성전자 부사장이 조만간 나온다”고 밝혔다. 이름과 부서, 직책까지 밝힌 ‘저의’는 곧 드러났다.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텔레비전 업계 트렌드를 주도하고 삼성전자 해외영업을 총괄하는 사람”이라며 “윤 부사장이 소환되는 모습이 나가면 비즈니스 자체에 타격이 있을 수 있다. 외국 경쟁 업체에 악용될 수도 있으니 익명 처리와 사진·동영상에 모자이크 처리를 해달라”고 기자들에게 요청했다. 일부 언론사는 삼성 쪽의 의견을 받아 들였지만, 취재진들 사이에선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면서 특검 수사에 소환되게 만든 삼성 쪽 책임이 더 크다”, “그런 논리라면 이건희 회장이 소환될 때는 얼굴과 이름은 물론, 소환 자체도 비밀이 돼야 하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정면돌파형=이같은 ‘복잡한 작전’ 대신 당당히 특검팀 건물 현관을 열고 사무실을 찾은 소환자들도 있다. 28일 조사를 받은 박태진(61) 삼성탈레스 사장과 장병조(54) 삼성전자 부사장, 앞서 27일 소환된 정기철(54) 삼성전자 부사장 등은 기자들의 사진 세례와 질문 공세를 묵묵히 뚫고 특검팀 현관을 거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특검팀 사무실로 올라갔다.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을 각인시켜며 전국민의 미술교양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홍송원(55) 서미갤러리 대표는 지난 25일 특검팀의 브리핑을 위해 취재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현관문을 통과했다. 정면돌파의 효과를 어느 정도 보기는 했지만, 사진기자가 아닌 취재기자의 일명 ‘똑딱이’ 사진기에 정면으로 얼굴이 찍혔다. 베일에 가려있던 홍 대표의 얼굴은 이날 손바닥만한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받은 방송사를 통해 전국에 방영됐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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