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 원형 식탁에 당신을 포함한 열 두 명 가량이 둘러 앉는다. 아침 식사를 걸러 허기가 졌던 터, 기분 좋게 밥을 한 술 뜨는 순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친구가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두가 들떠 있는 금요일 점심 시간, 그를 시작으로 테이블을 둘러 싼 열 명 여의 사람들은 즐거운 대화에 참여 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당신은 그저 묵묵히 밥만 먹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어’로 유쾌한 수다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일본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토종 한국인이다.
‘당신’을 열 일곱 살 일본 소녀 ‘무츠미’로, 그녀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사람들 모두를 한국인으로 바꾼다면, 내가 작년에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할 당시 겪었던 실제 상황이다. 평소에도 말이 없었던 무츠미의 입은 음식을 씹기 위해서만 오물거렸고, 그녀의 시선은 줄곧 식탁만을 향했다. 나 역시 무츠미와 음식만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릇을 빨리 비웠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 사람들, 왜 한국말만 해?”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일본인 친구가 있었다. 무츠미와의 일이 있기 하루 전, 그녀는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짧은 주말을 이용해 그녀는 세 명의 한국인, 한 명의 일본인과 함께 자동차 여행을 다녀왔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돌아 온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뭐, 그냥”이라며 묵묵부답이었던 그녀가 그날은 웬일인지 입을 열었다. “난 사실, 내가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학교로 향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 이유인즉슨, 여행에서 행선지를 결정하는 데 주도권을 지닌 운전자는 한국인이었고, 그를 포함한 나머지 한국인들은 자신들끼리 ‘한국말로’ 여행일정을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일본인 두 명에게는 변화된 행로를 귀띔조차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다른 일본 친구로부터 항의를 받았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여름방학이었고,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봉사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도 역시 우연치 않게, 가장 먼저 인연을 맺게 되어 무간하게 지내게 된 친구가 일본인이었다. 그녀는 한 방을 쓰는 여자 5명 중, 나를 포함한 나머지 4명과 유일하게 국적이 다른 룸메이트였다. 그녀는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우리를 피해 자주 방을 비웠고, 역시나,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녀들이 하는 말은 한가지였다. “괜찮아. 한국사람들이 많으니까 한국말 할 수밖에.” 하지만 나는 수긍하지 못하며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냈다. 첫 번째, 우리들은 외국인 한 명에 한국인 두 명이 모여 있을 때에도 한국말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중국인 6명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이 하는 대화에 참여할 수 없어 불편했던 추억은 내 머릿속에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사실 다른 이유 다 차치하고서, 이 것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끼리는 한국말 하는 게 편하다. 한국 사람들끼리 영어 하면 괜히 낯간지러운 거,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안다. 미국인들과 있을 때는 영어 잘 하던 사람도, 한국 사람 한 명 끼어들면 바로 한국 말 하는 사람 여럿 봤다. 영어, 수단 아닌 목적 되어야 한국 초. 중. 고등학생들은 영어, 대학 가려고 배운다. 한국 대학생들은 영어, 취직하려고 배운다. 그리고 직장인들은 영어, 좋은 직장 유지하려고, 혹은 더 좋은 일 찾으려고 배운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 ‘글로벌 한국’ 만든다 하며 좋은 대학 가기 위한, 좋은 일자리 얻기 위한 ‘도구로서의 영어’의 입지를 더욱 강화 시키고 있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고 싶어서, 아름다운 영어 문학을 번역체가 아닌 원문 그대로 감상하고 싶어서, 또는 나와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속 깊은 우정 혹은, 사랑을 나누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영어를 배우는 국민들이 늘어나도 토플 점수 153개국 가운데 109위 를 기록하게 될까? 영어, 결코 배우지 않을 수 없다. 한 영어 학자에 따르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으면서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모국어 사용자들보다 세 배나 많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아시아만 고려하여도 영어 사용자 수는 미국과 캐나다, 영국의 인구 수를 합한 것과 비슷한 3억 5천만 명에 이른다 . (이는 이미 2005년 통계이다.) 그런데 이것 제대로 배우기 전, 우리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apple’은 사과가 아니라 단지 ‘apple’이다. 영어는 우리 말로 해석되어야 할 대상도, 좋은 이력을 얻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단지 영어라는 언어, 그 자체로서 인정받아야 할 인간의 표현수단 중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가 다른 외국인은 결코 감정 없는 ‘외계인’이 아니다. 표현 수단이 다를 뿐, 우리 한국 사람과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느끼는 ‘인간’인 것이다. 이를 깨닫게 하는 교육이 참 영어교육이다. 영어 못한다고 대학 못 가고 취직 못 하는 나라가 아닌, 영어 못해도 떳떳하게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는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외국과 대화하는’ 글로벌 한국이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일본인 친구가 있었다. 무츠미와의 일이 있기 하루 전, 그녀는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짧은 주말을 이용해 그녀는 세 명의 한국인, 한 명의 일본인과 함께 자동차 여행을 다녀왔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돌아 온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뭐, 그냥”이라며 묵묵부답이었던 그녀가 그날은 웬일인지 입을 열었다. “난 사실, 내가 학교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학교로 향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 이유인즉슨, 여행에서 행선지를 결정하는 데 주도권을 지닌 운전자는 한국인이었고, 그를 포함한 나머지 한국인들은 자신들끼리 ‘한국말로’ 여행일정을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일본인 두 명에게는 변화된 행로를 귀띔조차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다른 일본 친구로부터 항의를 받았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여름방학이었고,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봉사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도 역시 우연치 않게, 가장 먼저 인연을 맺게 되어 무간하게 지내게 된 친구가 일본인이었다. 그녀는 한 방을 쓰는 여자 5명 중, 나를 포함한 나머지 4명과 유일하게 국적이 다른 룸메이트였다. 그녀는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우리를 피해 자주 방을 비웠고, 역시나,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녀들이 하는 말은 한가지였다. “괜찮아. 한국사람들이 많으니까 한국말 할 수밖에.” 하지만 나는 수긍하지 못하며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냈다. 첫 번째, 우리들은 외국인 한 명에 한국인 두 명이 모여 있을 때에도 한국말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중국인 6명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이 하는 대화에 참여할 수 없어 불편했던 추억은 내 머릿속에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사실 다른 이유 다 차치하고서, 이 것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끼리는 한국말 하는 게 편하다. 한국 사람들끼리 영어 하면 괜히 낯간지러운 거,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안다. 미국인들과 있을 때는 영어 잘 하던 사람도, 한국 사람 한 명 끼어들면 바로 한국 말 하는 사람 여럿 봤다. 영어, 수단 아닌 목적 되어야 한국 초. 중. 고등학생들은 영어, 대학 가려고 배운다. 한국 대학생들은 영어, 취직하려고 배운다. 그리고 직장인들은 영어, 좋은 직장 유지하려고, 혹은 더 좋은 일 찾으려고 배운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 ‘글로벌 한국’ 만든다 하며 좋은 대학 가기 위한, 좋은 일자리 얻기 위한 ‘도구로서의 영어’의 입지를 더욱 강화 시키고 있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고 싶어서, 아름다운 영어 문학을 번역체가 아닌 원문 그대로 감상하고 싶어서, 또는 나와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속 깊은 우정 혹은, 사랑을 나누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영어를 배우는 국민들이 늘어나도 토플 점수 153개국 가운데 109위 를 기록하게 될까? 영어, 결코 배우지 않을 수 없다. 한 영어 학자에 따르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으면서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모국어 사용자들보다 세 배나 많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아시아만 고려하여도 영어 사용자 수는 미국과 캐나다, 영국의 인구 수를 합한 것과 비슷한 3억 5천만 명에 이른다 . (이는 이미 2005년 통계이다.) 그런데 이것 제대로 배우기 전, 우리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apple’은 사과가 아니라 단지 ‘apple’이다. 영어는 우리 말로 해석되어야 할 대상도, 좋은 이력을 얻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단지 영어라는 언어, 그 자체로서 인정받아야 할 인간의 표현수단 중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가 다른 외국인은 결코 감정 없는 ‘외계인’이 아니다. 표현 수단이 다를 뿐, 우리 한국 사람과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느끼는 ‘인간’인 것이다. 이를 깨닫게 하는 교육이 참 영어교육이다. 영어 못한다고 대학 못 가고 취직 못 하는 나라가 아닌, 영어 못해도 떳떳하게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는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외국과 대화하는’ 글로벌 한국이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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