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 기간제한
노·사·정과 국회가 ‘제2의 근로기준법’이라는 비정규직 법안 제정을 놓고 날카로운 대립 속에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법안을 내놓은 정부는 “불합리한 차별과 남용을 규제하되 고용 유연성을 감안했다”지만, 노동계는 “보호법이 아닌 확산법”이라며 결사항전 태세다. 이 법안이 외환위기 이후 우리 일터와 삶의 풍경을 바꿔버린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을까?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평가를 중심으로 비정규직 법안의 허실을 세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사실상 3년간 무제한 허용
시한 다가오면 ‘해고 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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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노·사·정 사이의 논의가 끝나지 않았다”며 최씨 같은 ‘특수고용 노동자’를 이번 법안에서도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노동자임이 분명하지만, 이들(정부 통계 71만명)은 여전히 인권 사각지대에 남고 말았다. 적게는 360만명(노동부) 많게는 770만명(민주노총)까지 추산되는 기간제(임시계약직) 노동자들의 불투명한 ‘미래’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번 법안에서 정부는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을 사유에 따라 제한할 경우 부작용이 크다”며 ‘사유 제한’이 아닌 ‘기간 제한’(3년)을 택했다. “비정규직 고용의 사유를 따져 제한하는 방식은 기업의 인력 운용에 지나친 제약을 초래해, 고용 감소 등 노동자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이유다. 노동자들이나 노무사들은 “3년 동안 비정규직 사용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허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남 광주 노무법인 ‘무등’의 이병훈 노무사는 “한마디로 정부·여당의 비정규직 법안은 ‘비정규직 양산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전남 여수 산업단지의 많은 업체들 사이에선 비정규직 여사원이 1년11개월을 근무하면, 해고하고 한 달 뒤 다시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게 관행”이라고 말했다. 노동계 “파견확대도 문제”
많은 기간제 노동자들은 “3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 전환을 의무화한다”는 조항도 실감하지 못한다. 서울의 한 특급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이아무개(51)씨는 “해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회사 쪽이 더 낮은 임금을 들이대고 재계약을 요구하거나, 뚜렷한 이유 없이 재계약을 거부하는 일이 다반사인 비정규직에게 3년은 무의미한 얘기”라고 말했다. 실제 기아자동차는 지난해 12월31일 사무계약직 직원 54명을 해고했다. 해고된 직원 대부분은 파견업체 소속으로 2년 동안 근무 뒤 직접 계약직으로 전환해 만 3년째 근무를 앞두고 있었다. 이들에게 3년 가까이 일을 시킨 회사 쪽은 “업무 능력 부족”을 해고사유로 들었다. 한 시중은행은 최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일 잘하는 비정규직원들을 정규직원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이 은행에서 올해 정규직 전환을 계획하는 인원은 전체 비정규직 1만1천여명 가운데 50명에 불과하다. 또 은행들은 요즘 정규직 전환 요건에 ‘나이’ 등 갖가지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3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비정규직의 해고를 제한하는 정부 법안을 의식해, 법 시행 전에 장기 계약자를 정리하려는 게 속내”라고 털어놨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의 121개 회원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도 ‘비정규직 보호’를 내건 정부 법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던진다. 10곳 중 8곳의 기업들이 새 법률이 시행되더라도, 3년 근무한 기간제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고 다른 기간제 노동자로 교체해 부리거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해당 직무를 맡기겠다고 답했다. 파견 노동자들도 업종 제한을 풀어 사실상 파견근로를 전면 허용한 정부 법안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전남대병원에서 청소용역 파견업체 노동자로 일하는 ㅇ씨는 “52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해고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며 “그나마 제한을 풀어 ‘불행한 비정규직’을 더 늘리겠다는 법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정부의 파견업종 확대 조처는 45만명 이상인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합법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긍정적인 점도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불법을 양성화시키는 데 불과하다”는 노동계와 시민사회 단체의 반론에 부닥치고 있다. 정부 법안의 뼈대는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규제’는 완화하고 ‘차별금지’는 강화한다는 것이다. “규제 위주의 법안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일이 생기게 할 수는 없으며, 차별을 해소하면 된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차별’의 뿌리는 바로 ‘고용’에 있다는 지적에 정부는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양상우 정대하 서수민 기자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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