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뒷산 아름다운 시절 영화 마지막 장면 달구지 타고 가는 길 촬영지였답니다
떡쌀을 팔았다. 집에서 찧어 먹는 것은 아예 찹쌀을 섞은 것이라 가래떡으로 뽑을 수 없다. 맵쌀만 해야 찰지고 떡국을 끓여도 퍼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쌀 한 말을 팔아오며 생각이 많다.
해마다 시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시던 일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근 열흘 전부터 차근차근 명절맞이 준비를 하셨다. 튀김이며 전 부칠 것과 밑반찬꺼리 사다 냉장고 채워 놓고, 떡가래 뽑아다 썰어놓고, 질금 걸려서 단술 해 놓고, 콩 물에 담가 놓고, 강정이며 유과 등 명절 음식을 챙겼다. 당신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나를 불러 ‘이것 챙겨라 저것 챙겨라’ 잔심부름을 시켰다. 겉으로는 ‘예’하면서 득달같이 달려가지만 속내는 솔직히 불만도 많았다. 그랬는데 이번 설맞이는 의외로 시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지난 연말부터 아프신 어른들 덕에 시댁으로 아예 출퇴근을 한다. 설이 다가오자 은근히 걱정이었다. 시어머님 시키는 대로 오일장에서 참깨를 팔아 오남매 나누어줄 참기름과 깨소금은 볶아 놓고 생선이며 반찬꺼리도 준비 했지만 정작 가래떡이며 두부 등 명절 음식은 만들 엄두가 안 났다. 서울 형님이 ‘동서 힘든데 조금씩 사서 쓰자. 떡도 떡집에서 사고 두부도 몇 모 사자.’고 하셨다. 솔직히 내 편한 것만 생각하면 그러자고 하고 싶지만 우리 식구 먹을 음식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내키지를 않았다.
떡집에서 만들어 놓고 파는 가래떡은 수입쌀일 확률이 높고, 찰 지게 만들기 위해 갈분 가루를 섞는다는 말도 들었다. 두부 역시 거의 수입 콩으로 만든다고 했다. 농사지은 콩이 없다면 모르지만 콩도 있고, 쌀도 있는데 싶어 내가 좀 힘들어도 만들자고 작정했다. 집에서 만들면 모든 게 푸지다. 시장에서 사면 돈은 돈대로 헤프고, 대식구 입치레 하려면 금세 구는 게 또한 명절 음식 아닌가. 어쩔 거냐고 묻는 시어머니께 해 먹자고 했다.
“쌀 있겠다. 콩 있겠다. 힘만 보태면 되는데 만들 시더. 두부는 남자들 부리 묵지 예. 형님이 김치만두 만들어 먹자는데 두부는 있어야 할 것이고 사서 쓰면 헤퍼서 안 될 것 같아 예”
시어머님은 당신이 늘 했던 것을 며느리에게 일임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쌀은 담갔느냐, 동네 방앗간에 가라, 스무 엿새 쯤 되면 한가하니 그 때 해라, 담을 그릇은 있느냐, 떡가래 뽑아오면 깨끗한 비닐을 마루에 깔고 떼어서 말려라, 몇 번을 옮겨서 까시리(겉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을 정도로 반쯤 마른 상태)하게 마른 후에 엇 썰기를 해라, 다 썬 다음에는 마르지 않게 깨끗한 천을 덮어 비닐을 씌워놔야 한다.’면서 조목조목 일러주신다. 아들과 담가놨던 떡쌀을 건져 방앗간에 갔더니 삼이웃 노인들 총 출동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래떡이 입맛을 당겼다. “와, 맛있겠다. 우리 꺼 하기 전에 먹고 싶어 숨넘어가겠네.” 농담을 했더니 “떡 하로 왔소. 시어마이가 아풍께 심들제. 아나, 한 가락 잡사 보소. 뜨끈한 때 묵어야 마싰니라.” 뜨끈한 가래떡 한 가닥을 내 미는 분은 이웃에 사는 할머니다. 얻은 가래떡을 혼자 먹을 수 없어 이 사람, 저 사람 나누었더니 내 몫으로 남은 것은 한 입이다. 쌀농사 안 짓고 쌀 팔아 가래떡을 한다면 아무리 이웃 사람이라도 한 가닥 먹어보란 소리 못할 것이고, 한 가닥 먹어보자고 손 내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만큼 쌀값도 떡 만드는 삯도 비쌌다. 얻어먹은 떡값을 해야 한다며 아들을 불러 앞앞이 나오는 가래떡 함지나 박스, 다래기를 들어다 리어카에도 올려드리고, 경운기 가지고 오신 분은 짐칸에 올려 드리며 숙연해졌다. 이것도 다 농촌에 사는 시부모나 친정부모가 근력이 있을 때까지 이야기다.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식에게 쌀과 곡식을 대 주고, 명절이면 가래떡도 한 두 말씩 뽑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른들 아파 눕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자식은 부모를 힘들어하게 되는 것 같다. 부모는 열 자식 탈 없이 거느리고 뒷바라지해도 자식은 한 부모 모시기도 힘겹다 한다. 사실 ‘왜 내가 해야 해’ 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병든 부모 모시기 아닐까. 자식이라면 누구든 ‘당연히 내가 할 일인 걸.’ 생각한다면 병든 부모 모시는 일도 덜 힘들지 않을까. 그래도 요즘 어른들은 현명한 것 같다. 세태 따라 생각을 달리 하는 어른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엊그제 이웃 칠십대 할아버지를 승용차로 모셔 드린 적이 있다. 그 분 말씀이 허리가 꼬부라진 아내를 꾸지람 했단다. 당신들 먹는 기름은 기름집에서 짜 놓은 것을 사다 먹으면서 설에 올 자식들 줄 것은 비싼 국산 깨 팔아 씻어서 직접 기름집에 가져가서 짜더란다. 참기름 짜려면 일이 얼마나 많으냐면서 왜 그 짓을 하느냐고 했단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말라면서 호통을 쳤더니 할머니께서 ‘그래도 아이들 줄 낀데 우찌 그리 삿소.’하더란다. “인자 우리는요. 다리 심 빠지모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에 갈 생각해야 돼요. 자식들이 아무리 많아도 한 부모 모실 자식 없소. 그리 생각하고 살아야 돼요. 할마씨가 지 몸 생각은 안하고 자식들 챙기 봤자 요새 세상에는 소용없어요. 나는 우리 할마씨 밥 못해줄 정도 되모 집이고 논이고 싹 팔아서 양로원 들어 갈 끼라요. 그라고 나머지는 저거들 안 섭하게 나놔 주삐모 되는 기라요.” 과연 그 할아버지 생각이 현명한 것일까. 솔직히 지천명 넘긴 나도 다음에 자식들 짐 되면 양로원이나 요양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확신이 없다. 노인이 될 수록 지혜로운 처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늙어가는 일 같다. 가래떡을 뽑아 아들에게 함지 째 들고 시댁으로 갔다. 뜨끈한 것을 썰어 기름장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 내 놓았다. 말라고 가져왔냐고 하시면서도 두 분이 달게 드신다. “어무이 떡 뒤집을 때 참기름을 발라야 해 예? 물에 손만 적셨다 떼면 돼 예? 얼마나 말랐을 때 썰어야 해 예?” 뻔히 아는 사실인데도 자꾸 묻는다. 어찌 어찌 하라고 일러주시는 시어머니 목소리에 활기가 넘친다. 당신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행복해 하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님은 당신이 늘 했던 것을 며느리에게 일임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쌀은 담갔느냐, 동네 방앗간에 가라, 스무 엿새 쯤 되면 한가하니 그 때 해라, 담을 그릇은 있느냐, 떡가래 뽑아오면 깨끗한 비닐을 마루에 깔고 떼어서 말려라, 몇 번을 옮겨서 까시리(겉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을 정도로 반쯤 마른 상태)하게 마른 후에 엇 썰기를 해라, 다 썬 다음에는 마르지 않게 깨끗한 천을 덮어 비닐을 씌워놔야 한다.’면서 조목조목 일러주신다. 아들과 담가놨던 떡쌀을 건져 방앗간에 갔더니 삼이웃 노인들 총 출동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래떡이 입맛을 당겼다. “와, 맛있겠다. 우리 꺼 하기 전에 먹고 싶어 숨넘어가겠네.” 농담을 했더니 “떡 하로 왔소. 시어마이가 아풍께 심들제. 아나, 한 가락 잡사 보소. 뜨끈한 때 묵어야 마싰니라.” 뜨끈한 가래떡 한 가닥을 내 미는 분은 이웃에 사는 할머니다. 얻은 가래떡을 혼자 먹을 수 없어 이 사람, 저 사람 나누었더니 내 몫으로 남은 것은 한 입이다. 쌀농사 안 짓고 쌀 팔아 가래떡을 한다면 아무리 이웃 사람이라도 한 가닥 먹어보란 소리 못할 것이고, 한 가닥 먹어보자고 손 내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만큼 쌀값도 떡 만드는 삯도 비쌌다. 얻어먹은 떡값을 해야 한다며 아들을 불러 앞앞이 나오는 가래떡 함지나 박스, 다래기를 들어다 리어카에도 올려드리고, 경운기 가지고 오신 분은 짐칸에 올려 드리며 숙연해졌다. 이것도 다 농촌에 사는 시부모나 친정부모가 근력이 있을 때까지 이야기다.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식에게 쌀과 곡식을 대 주고, 명절이면 가래떡도 한 두 말씩 뽑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른들 아파 눕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자식은 부모를 힘들어하게 되는 것 같다. 부모는 열 자식 탈 없이 거느리고 뒷바라지해도 자식은 한 부모 모시기도 힘겹다 한다. 사실 ‘왜 내가 해야 해’ 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병든 부모 모시기 아닐까. 자식이라면 누구든 ‘당연히 내가 할 일인 걸.’ 생각한다면 병든 부모 모시는 일도 덜 힘들지 않을까. 그래도 요즘 어른들은 현명한 것 같다. 세태 따라 생각을 달리 하는 어른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엊그제 이웃 칠십대 할아버지를 승용차로 모셔 드린 적이 있다. 그 분 말씀이 허리가 꼬부라진 아내를 꾸지람 했단다. 당신들 먹는 기름은 기름집에서 짜 놓은 것을 사다 먹으면서 설에 올 자식들 줄 것은 비싼 국산 깨 팔아 씻어서 직접 기름집에 가져가서 짜더란다. 참기름 짜려면 일이 얼마나 많으냐면서 왜 그 짓을 하느냐고 했단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말라면서 호통을 쳤더니 할머니께서 ‘그래도 아이들 줄 낀데 우찌 그리 삿소.’하더란다. “인자 우리는요. 다리 심 빠지모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에 갈 생각해야 돼요. 자식들이 아무리 많아도 한 부모 모실 자식 없소. 그리 생각하고 살아야 돼요. 할마씨가 지 몸 생각은 안하고 자식들 챙기 봤자 요새 세상에는 소용없어요. 나는 우리 할마씨 밥 못해줄 정도 되모 집이고 논이고 싹 팔아서 양로원 들어 갈 끼라요. 그라고 나머지는 저거들 안 섭하게 나놔 주삐모 되는 기라요.” 과연 그 할아버지 생각이 현명한 것일까. 솔직히 지천명 넘긴 나도 다음에 자식들 짐 되면 양로원이나 요양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확신이 없다. 노인이 될 수록 지혜로운 처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늙어가는 일 같다. 가래떡을 뽑아 아들에게 함지 째 들고 시댁으로 갔다. 뜨끈한 것을 썰어 기름장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 내 놓았다. 말라고 가져왔냐고 하시면서도 두 분이 달게 드신다. “어무이 떡 뒤집을 때 참기름을 발라야 해 예? 물에 손만 적셨다 떼면 돼 예? 얼마나 말랐을 때 썰어야 해 예?” 뻔히 아는 사실인데도 자꾸 묻는다. 어찌 어찌 하라고 일러주시는 시어머니 목소리에 활기가 넘친다. 당신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행복해 하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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