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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등록 2008-02-11 11:27수정 2008-02-11 15:44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2년여의 암투병의 마지막 종착역에 다달은 선배를 만나고 집에 왔습니다. 종일 책도 눈에 안들어오고, 술도 입에 쓰네요. 몇시간을 곰곰히 누워있다, 이렇게 자판을 두드립니다.

오늘은 음력 1월 2일, 아직 휴일인데 응급 ERCP(담도내시경)가 필요한 환자가 있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나온 김에 입원환자 명단을 보는데, 낮 익은 이름이 보이네요.

-헤어지고 한나절도 안되어 응급실로

2005년 마감하는 겨울의 어느날, 원준이형과 형의 가장 친한 친구 원종문, 또 다른 형들과 새벽까지 잔을 기울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우리 밖에 없는 작은 해장국집에서 젓가락장단에 부른 노래를 기억하세요? '우리들의 ##의 대오 속에 비겁의 술냄새 난다면, 머리통만 빠게고 혓바닥만 놀리는 빌어먹을 술을 술을 끊겠다.~~~'

학교를 떠난 후, 다들 일상에 찌들어 살아왔지만 이렇게 묻혀갈 수는 없다며 2006년을 고민하는 날이었죠. 태어난지 2달된 우리 '희망물결'의 갈 길을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형은 대장암 말기로 진단되었고, 막힌 장을 복벽으로 내놓아야 했죠.


-진통제로 버티며 준비한 단재문화전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계속되는 항암치료로 힘들텐데도, 'Love Cancer'란 모임을 만들어 다른 암환자들을 짬짬이 돕고, 지난 여름, 모든 항암제가 효과가 없다는 선고에 절망하지 않고, 내 생의 마지막 사업이라며 단재예술제전의 사무국장으로 뛰어드는 형을 보며 놀랐습니다. 때론 가누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여름과 가을을 온전히 바친 행사는 형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몰래 진통제를 타러 오시는 형을 말려야할지 고민도 했지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그냥 일하시게 둔 것이 잘한 것 같네요.

-나중에 아이들이 읽을 편지를 써 놓아요.

설 전날에 입원하신 줄도 모르고, 오늘에서야 찾아 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걸어 나갈 수 없어서 담배도 못 피우셨다는군요. 형수님 안계실 때, 휠체어 타고 밖에 나와 담배 피우며 물어보십니다.
"나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몇달 갈까?" / "음. 한달 못넘길 것 같아."
유서는 썼는지 형에게 물어보았다.
"아직 실감이 안나서 못썼어." / "글 쓸 기운 있을 때 써, 비디오카메라 갔다줄까?"

이제 5학년이 되는 큰아들이 성년이 되면 읽을 편지, 결혼할 때 읽을 편지들. 3학년과 1학년이 되는 딸아이들에게도 시집갈 때 읽을 편지, 엄마가 되었을 때 읽을 편지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

기억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고 싶은 용서와 부탁들. 그리고, 혹시 미처 기억하지 못하였거나, 시간이 부족하여 편지를 남기지 못한 이들 모두를 위한 편지도 꼭 쓰라고...

-죽을 때를 고통없이. 부탁한다.

"죽을 때 많이 아플까?" / "글쎄, 아퍼하는 사람 거의 못봤어."
"아직은 죽는게 실감이 안나서 그런지 무섭지는 않아." / "......"
"아이들이 자라며, 나를 못만나게 되는게 제일 슬퍼." / "나도 그래."
"아이들 편지는 누구에게 맞기지?" / "종문이형"
"집사람 재혼해야 할텐데, 종문이와 연락하고 살긴 좀 그렇쟎아." / "......"
"......" / "미리 이야기하는데, 나는 안돼. 형, 알잖아. 나는 오래 살 자신 없어."

"입원한거 비밀로 해줘. 오는 사람 접대하기 힘들어." / "한번에 단체로 오라 할께."
"정호야, 죽을 때 고통없이 죽게해줘라." / "응."

- 더 사무치게 그리운 찬우형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형의 한 달 남짓한 생(生) 앞에서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8년전 찬우형과 이별할 때는 제가 너무 두려웠어요. 암으로 32살의 찬우형이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원준이형을 보면 찬우형이 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때 저는 찬우형에게 딸(희수)을 위한 편지를 쓰도록 도와줄 마음의 여유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희수가 사춘기로 방황하고, 아빠가 무엇인지 궁금할 때 꺼내 볼 아빠의 이야기. 희수가 결혼할 남자친구에게 보여줄 아빠의 자취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의 기억의 자락을 모아 보겠습니다.

제가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 버릇이 없다고 손가락질 당한 기억은 많아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네요. 정신지체가 있는 동생까지 돌봐야하는 엄마는 장난감가계, 아동복장사를 거쳐, 김밥장사도 해야 했고, 건방진 나는 차라리 고아원에 가서 살기를 바라던 시절도 있었죠. 나 처럼 삐딱한 어린 날을 보내지 말고, 형들의 아이들은 세상을 밝게 보고,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추신: 고원준을 기억하시는 분은 전화나 방문보다는 문자메세지나 편지를 보내주세요. 함께 살아온 흔적이 담긴 내용의 자필 편지가 제일 좋더군요.
주소 :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 2가 100-2번지 2층 디자인101'
친구 원종문의 사무실입니다. 본인이나 가족에게 고이 전해 줄 껍니다.

/한정호(청주성모병원 내과과장)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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