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이씨가 대구시 중구의 한 골목길에서 서서 배를 감싸 쥐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만삭의 이사이(27·가명)는 낯선 이국에서 몸 누일 곳조차 없이 떠도는 처지다. 가진 것은 옷가방 하나가 전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외국인 친구들 집에 사나흘씩 신세를 진다. 지난해 11월 말 월세 15만원을 내지 못해 대구시 봉덕동에 있던 방을 뺀 뒤부터다. 이사이는 9개월 된 뱃속 아기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퍼에게 “최소한의 양육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는 미군으로 대구에서 근무하다가 지난해 그가 임신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갔고, 최근에 연락을 끊었다.
지난해 11월 이사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 외국인보호실에 갇혔다가 대구성서공단노동조합 쪽의 노력으로 강제 출국은 미뤄진 상태다.
이사이는 즐겨 보던 한국 드라마 속 삶을 꿈꾸며 예술흥행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다. 2005년 봄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면 괜찮은 벌이를 할 수 있다는 한국인 매니저의 말을 믿고 필리핀 현지에서 6개월 동안 노래 연습까지 했다. 혼자 키우던 다섯살배기 아들은 고향의 부모에게 맡겨둔 채 “돈을 벌어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은 드라마 속 한국과 달랐다. 매니저가 소개한 업소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술시중을 들어야 했다. 인천에서 성매매까지 요구하는 한국인 업소를 나와 그해 여름, 대구에 있는 미군 클럽에 흘러들었다.
여권까지 매니저에게 빼앗겼지만, 무작정 업소를 뛰쳐나왔다. 클럽에서 알게 된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바텐더로 일하면서 레스토랑 주방일을 돕기도 하고,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을 꾸려갔다. 필리핀 집으로 돈을 부쳐줄 수 있을 만큼 벌이가 괜찮을 때도 있었지만, 일거리가 없을 때도 많았다. 일자리를 얻기 어려울 때는 미군들이 드나드는 바에서 이른바 ‘주스걸’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 크리스토퍼를 만나 동거를 하게됐고, 아이를 가졌다.
크리스토퍼는 미국에 들어간 뒤 석달 동안은 돈을 보내주기도 하고, 문자메세지와 전화로 자주 연락을 해왔지만, 차츰 연락이 뜸해지더니 얼마 전부터는 이사이의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이사이는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자고 약속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아픔은 말로 다 할수 없지만, 절대로 울지 않는다”며 “아이 아버지도 똑같이 부모로서 책임 질 것을 요구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크리스토퍼의 소속 부대와 미국 집주소, 휴대폰 전화번호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연락을 끊은 이상 찾을 길이 막막하다. 미국의 소속 부대에 연락을 해봤지만, “현재 근무기지에 있지 않다”는 말만 돌아왔다. 이사이는 “이라크의 인권까지 챙기는 미국이 왜 아이를 버린 미군 하나 찾아주지 못하냐”며 소송을 해서라도 아이 양육비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사이는 다행히 아이를 낳고 몸조리 할 곳은 구했다. 성서공단노조 쪽에서 대구의 한 병원과 교회 쉼터를 소개해 줬다. 그는 “만삭의 몸으로 이렇게 비참하게 거리를 떠돌게 될 줄은 몰랐다. 한국에 온 걸 후회한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렇다고 당장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사이는 “당장 비행기 삯이 없을 뿐더러 한국에 돈 벌러 간다고 해놓고 빈 손으로, 애비없는 아기까지 안고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다”고 말했다. 당장 태어날 아기에게 먹일 분유나 기저귀, 옷가지 하나 마련해 두지 못했다. 그래도 뱃속에서 태동이 느껴지자, 이사이는 “아기가 기운이 센 것 같다”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 순간, 낯선 땅에서 비혼모가 된다는 두려움은 잠시나마 잊은 듯 했다. 대구성서공단노조 (053) 585-6206. 대구/글·사진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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