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 재구성
작년 두차례 현장답사 ‘치밀’…범행 다음날 화투놀이
작년 두차례 현장답사 ‘치밀’…범행 다음날 화투놀이
경찰은 12일 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아무개(70)씨가 지난해 7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현장을 답사하는 등 방화에 앞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경찰 발표를 보면, 인천 강화군에서 이혼한 전처와 함께 살고 있는 채씨는 설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오후 3시께 경기 일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와 시너가 채워진 페트병 등을 담은 배낭을 멘 채였다. 일산에서 내린 채씨는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 숭례문으로 향했다.
저녁 8시께 서울시청과 숭례문 중간인 태평로 정류장에서 내린 채씨는 짐을 양쪽 어깨에 둘러멘 채 숭례문까지 걸어갔다. 연휴 마지막날 길에는 적지 않은 차량과 행인들이 있었지만, 채씨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어둑한 저녁 시간 숭례문 서쪽 비탈을 기어올라간 채씨는 미리 준비해 온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를 이용해 누각을 둘러싼 담을 넘었고 이어 2층 누각으로 올라갔다.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경비회사의 폐쇄회로 텔레비전에 채씨의 출입 모습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채씨는 배낭 속에 넣어온 시너가 담긴 1.5ℓ짜리 페트병 셋 가운데 하나의 뚜껑을 열어 바닥에 시너를 뿌리고 곧이어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금세 나무 바닥에 불이 붙으며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사다리와 라이터, 배낭 등을 현장에 남겨둔 채 채씨는 숭례문을 빠져나왔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누각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목격하고 119에 화재신고를 했다.
인근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택시를 잡아탄 채씨는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해 경기 일산의 아들 집으로 향했고, 아들에게 방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사이 불은 지붕 속 통나무(적심)에까지 옮겨붙었다. 소방당국은 “적심에 불이 붙어 물을 뿌려도 진화가 안 됐다”고 밝혔다. 채씨는 바닥에 불을 붙인 뒤 곧바로 내려와 불이 어떻게 번졌는지 모른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불이 기둥을 타고 올라갔는지, 시너 폭발로 순간적으로 지붕 쪽에 불이 번졌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날 채씨의 행적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았지만, 우연히 사다리를 메고 숭례문을 넘어가는 채씨를 목격한 한 시민은 그의 인상착의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튿날 동일수법 전과자를 조회하다 2006년 창경궁에 불을 질렀던 채씨의 소재 확인에 나섰다.
그사이 아들 집에서 하룻밤을 잔 채씨는 11일 새벽 전처 집으로 돌아와 낮에 동네 노인들과 화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채씨는 이날 저녁 7시40분께 마을회관 앞에서 서울경찰청 강력계 소속 형사들과 마주쳤고, 임의동행된 지 30여분 만에 범행 사실을 털어놨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지 하룻만인 저녁 8시15분께 긴급체포돼 경찰에 압송된 채씨는 “가족들과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했지만, 국보 1호 숭례문은 이미 잿더미로 변한 뒤였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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