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금각사의 화재 전후와 복원 모습. 1397년 창건된 금각사는 600여년 가까이 보존되어 오다(왼쪽 사진), 1950년 한 학승의 방화로 앙상한 검은 잔해만 남았다. (가운데) 일본은 시행착오 끝에 반세기에 걸쳐 금각사를 복원했다. (오른쪽)
1397년 건축…세계문화유산 등록
1950년 21살 행자승이 방화 · 전소
서둘러 5년만에 복원했으나 ‘뒤탈’
수차례 재공사…반세기만에 완공
지금은 교토 외국관광객 필수코스 일본 금각사(긴가쿠지)는 역사도시 교토를 처음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들르는 필수 코스다. 정식 명칭이 노쿠온지인 이 절은 금빛 찬란한 자태를 뽐내는 중심 건축물인 3층 사리전 ‘긴가쿠’(금각) 때문에 금각사로 불린다. 1397년 건축된 금각사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는 등 일본인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적이다. 하지만 원형 그대로는 아니다. 한국의 국보 1호 숭례문처럼 이 절도 1950년 7월2일 방화로 대부분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일본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앙상한 잔해만 남아 지금의 화려함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이 절이 소실된 정황과 일본 사회에 던진 충격도 지금의 한국과 엇비슷했다. 불을 지른 21살의 행자승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사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다”라고 범행동기를 밝혔다. 일본 극우를 대표하는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1956년 출간 소설 <금각사>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기자 시절 특종 보도한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숭례문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은 금각사 복원 과정이다. 시행착오를 거쳐 제대로 되살려내는 데 꼬박 반세기의 세월이 걸렸다는 점이다.
금각사가 불탄 뒤 일본에서는 곧바로 국민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돈으로 3천만엔에 이르는 복원 비용이 마련됐다. 3년 간의 작업 끝에 금각은 1955년 복원됐다. 메이지 시대인 1903년 대대적인 수리를 거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세한 도면 덕분에 비교적 원형에 충실하게 이전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복원된 모습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재와는 사뭇 달랐다. 서둘러 복원한 탓에 군데군데 금박이 떨어져나가 ‘금각’이 아니라 ‘흑각’이라는 야유까지 받기도 했다. 결국 일본 문화재당국은 1987~88년 7억4천만엔의 거금을 들여 2차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가로·세로 약 10㎝의 금박 20만장을 접착력이 강한 칠로 붙였다. 이때 금박이 600년 이상 지탱할 수 있도록, 보통 금박보다 5배나 두꺼운 1만분의 5㎜짜리를 붙이는 난공사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에는 제3차 복원공사를 단행해 누각 지붕의 널을 전면 교체했다. 방화로 소실된 지 50년째를 맞은 1999년 7월1일 오늘날의 금각사가 재탄생했다. 복원·재건축된 금각이 너무 금빛 찬란하게 변신한 데 대해선 일본 안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렇지만 반세기에 걸쳐 정성들인 복원작업이 있었기에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 수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1950년 21살 행자승이 방화 · 전소
서둘러 5년만에 복원했으나 ‘뒤탈’
수차례 재공사…반세기만에 완공
지금은 교토 외국관광객 필수코스 일본 금각사(긴가쿠지)는 역사도시 교토를 처음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들르는 필수 코스다. 정식 명칭이 노쿠온지인 이 절은 금빛 찬란한 자태를 뽐내는 중심 건축물인 3층 사리전 ‘긴가쿠’(금각) 때문에 금각사로 불린다. 1397년 건축된 금각사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는 등 일본인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적이다. 하지만 원형 그대로는 아니다. 한국의 국보 1호 숭례문처럼 이 절도 1950년 7월2일 방화로 대부분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일본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앙상한 잔해만 남아 지금의 화려함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이 절이 소실된 정황과 일본 사회에 던진 충격도 지금의 한국과 엇비슷했다. 불을 지른 21살의 행자승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사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다”라고 범행동기를 밝혔다. 일본 극우를 대표하는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1956년 출간 소설 <금각사>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기자 시절 특종 보도한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숭례문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은 금각사 복원 과정이다. 시행착오를 거쳐 제대로 되살려내는 데 꼬박 반세기의 세월이 걸렸다는 점이다.
금각사가 불탄 뒤 일본에서는 곧바로 국민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돈으로 3천만엔에 이르는 복원 비용이 마련됐다. 3년 간의 작업 끝에 금각은 1955년 복원됐다. 메이지 시대인 1903년 대대적인 수리를 거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세한 도면 덕분에 비교적 원형에 충실하게 이전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복원된 모습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재와는 사뭇 달랐다. 서둘러 복원한 탓에 군데군데 금박이 떨어져나가 ‘금각’이 아니라 ‘흑각’이라는 야유까지 받기도 했다. 결국 일본 문화재당국은 1987~88년 7억4천만엔의 거금을 들여 2차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가로·세로 약 10㎝의 금박 20만장을 접착력이 강한 칠로 붙였다. 이때 금박이 600년 이상 지탱할 수 있도록, 보통 금박보다 5배나 두꺼운 1만분의 5㎜짜리를 붙이는 난공사를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에는 제3차 복원공사를 단행해 누각 지붕의 널을 전면 교체했다. 방화로 소실된 지 50년째를 맞은 1999년 7월1일 오늘날의 금각사가 재탄생했다. 복원·재건축된 금각이 너무 금빛 찬란하게 변신한 데 대해선 일본 안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렇지만 반세기에 걸쳐 정성들인 복원작업이 있었기에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 수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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