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총풍’ 사건에서 안기부가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공개해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7부(재판장 김윤기)는 17일 오정은(53) 전 청와대 행정관과 장석중(56)씨가 “안기부의 가혹행위, 명예훼손 등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오씨에게 1천만원, 장씨에게 4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안기부 내부 문건에 ‘내연의 여자가 있다’ ‘빚 때문에 이 사건을 모의했다’는 등 장씨의 사생활을 공개한 것은 정당한 수사 발표를 넘어선 명예훼손”이라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없었다는 것을 해명할 목적으로 안기부가 문건을 작성했고, 문건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검사가 이들을 조사할 때 변호인 접견 신청을 거부해 정신적 고통을 끼친 데 대해서도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사건 당시 ‘고문에 의한 안기부의 조작극’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으로 큰 논란이 일었던 점과 관련해, 재판부는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고문을 당한 상황에 대한 장씨와 오씨의 진술이 계속 바뀐 점이나 장씨의 멍든 몸을 찍은 사진을 감정한 결과 등을 종합할 때 이들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2003년 이 사건 상고심에서 “총격 요청 등 한씨의 돌출행동이 있었지만 세 사람 사이에 사전 모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으나, 고문·조작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총풍 사건은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오씨와 장씨, 그리고 한성기(46)씨가 판문점 총격시위를 북한에 요청했던 사건을 말한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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