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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잘나가던 은행지점장서 안마봉사 ‘약손 아저씨’로

등록 2008-02-27 14:31수정 2008-02-27 21:41

마흔일곱에 갑자기 실명…딸 결혼에 해 될까 ‘은둔’
물리 치료사 제안에 새삶 “첫 안마 순간 잊지 못해”

“황반변성증입니다. 시력을 잃게 되실 겁니다.”

그를 어둠으로 몰아넣을 낯선 이름의 병이 찾아온 건 2002년 겨울이었다. 원인도 스트레스로 추정될 뿐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했다. 김민호(53·가명)씨가 외환위기를 견디고 ㅇ은행 입사동기 중 제일 먼저 지점장으로 승진한 지 3년 만이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딸이 있었다. 일을 더 해야 했다.

1년여를 버텼다. 시각장애인들이 인터넷을 쓰도록 돕는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을 배웠다. 하지만 결재 서류의 표지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에 이르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점자도 직장에서는 소용 없었다. 결국 사표를 썼고, 은행에서는 한 창업센터를 소개해줬다. 하지만 창업센터에서는 “시력을 잃은 상태라 소개해 줄 만한 일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20년을 일했는데 몸 한군데 고장났다고 무조건 은행을 나가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며 “47살 한창 때였지만 시각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뒤 김씨는 휴대전화를 끊었다. 누군가 안부를 물어올까 싶어서였다. 아버지가 시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딸들 결혼에 지장이 생길까봐 밖에는 시각장애 사실을 감췄다. 병원에 다니는 것 말고는 집을 나서지도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2005년 한 물리치료사가 “안마사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한 게 김씨를 다시 사회로 끌어낸 계기가 됐다. 김씨는 “시각장애인들이 할 일은 안마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안마라고 하면 퇴폐 영업을 떠올리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다른 일을 찾고 싶었다”며 “하지만 정말 그 일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가족을 설득했다.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 만에 사회로 나와 20년 사무보던 손으로 안마 일을 배운다는 건 김씨의 말대로 “두려운 도전”이기도 했다.


김씨는 처음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을 댄 순간을 잊지 못한다. 2006년 여름, 안마를 배운 지 석달도 안 돼 나간 안마봉사 때였다. 김씨는 “요양원에서 깡마른 할머니 어깨에 손을 대기만 한 것 같은데, 할머니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직업 안마사들은 40~50분씩 안마하고 1시간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3~4명 정도만 안마를 하지만, 당시 5~6명까지 이를 악물고 안마해줬다”며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해준 그 분들이 고맙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22일 안마사 자격증을 땄다. 석달 뒤엔 안마원을 창업할 계획이다. 휴대전화도 5년 만에 개통한다. 김씨는 “안마원을 열면 일주일에 한차례 무료 안마봉사를 할 것”이라며 “누군가가 이 손을 필요로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부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정안인(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하도록 안마사 제도를 바꿀 것이라는 말이 돈다”며 “새 정부가 인생의 마지막에서 제 할 일을 찾은 시각장애인들을 배려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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