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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폭행 의사, 스포츠계 성폭행 등의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더군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성폭행범을 잡아 경찰에 신고하고 참고인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근무하면서는 숱하게 많은 성폭행피해자들을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문제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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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이 있던 해 늦은 가을의 토요일 저녁
같은 동네 사는 여중생이 저희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얼굴과 눈은 퉁퉁 부은 채로, 흙투성이가 된 옷을 보고 직감했습니다(여학생 부모님이 외출 중이었다네요).
"누구야? 어디서 그랬어?"
"모르는 아저씨 2명이......., 아랫 동네 공사장......"
같이 있던 (주먹으로 유명한) 친구와 저는 후다닥 뛰어 나갔습니다. 친구는 윗동네로, 저는 아랫동네로 흩어져 1시간여 동안 뛰어 다녔지만, 저는 헛수고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집 앞 골목의 반대편에 2명의 남자가 뛰어오고, 그 뒤의 제 친구가 '잡아!' 하고 소리치며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돌진해 오는 앞 사람은 놓쳤지만, 그 뒤에 뛰어오는 다른 사람은 잡았습니다. 골목 어귀에서 아무리 도와 달라고 소리 쳐도, 나와 보기는 커녕 경찰에 신고해 주는 사람도 없더군요. 친구와 둘이 그 놈을 잡고, 간신히 공중전화까지 가서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이런 질문을 피해자 여중생에게 하더군요.
다음날, 여학생과 학생의 어머니, 저와 친구, 이렇게 4명이 관할 파출소에 갔습니다. 파출소 중앙의 책상 앞에 여학생을 앉혀 놓고, 바로 옆 책상에 30대 초반의 그 성폭행범을 나란히 놓고, 저희는 여학생 뒤에 서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책상 너머 경찰아저씨는 다음과 같은 질문하였습니다.
-강제 또는 합의 였는지? 누가 어떻게 때렸는지?
-성폭행한 순서와 자세는? 각각 시간이 얼마가 걸렸고, 콘돔을 사용했는지...
-오천원의 수고비는 성격은? (강제로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는 치밀함)
-성폭행범을 잡으며 상처를 입힌 저와 친구의 잘못에 대한 추궁
(이상의 질문은 아주아주 순화하여 적은 것입니다. 사실은 insertion depth, ejaculation site까지 아주 자세한 설명을 여학생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은 파출소 한 복판에서 벌어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었습니다. 킥킥 대고 웃는 사람, 만오천원 줄테니 사창가에 가라며 성폭행범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경찰관. 집 근처의 파출소이니, 아주머니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
폭행범은 도망간 친구가 주동했고, 여학생이 돈 때문에 따라 오고선 딴소리를 하는 것이라며 짜증까지 내더군요. 급기야 폭행범의 부인이 1살이 갓 넘은 아이를 업고, 파출소에 들어와 대성통곡을 하는 난장판까지 벌어졌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합의해 줄 수 밖에 없더군요.
자, 이 상황에서 피행자 여학생과 어머니의 정신상태가 어떨 것 같습니까? 눈물을 흘리다 지쳐, 공황상태가 되더군요. 괜한 고생하지 말고, 빨리 합의하라는 경찰아저씨 한마디에 합의금 150만원으로 사건은 즉시 종결되었습니다.
저희는 소문이 새어 나갈까 걱정하는 어른들의 눈치를 살펴야했고, 몇달 뒤 여학생네 집은 어디론가 이사를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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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사건을 통하여 몇가지 교훈을 배웠습니다. 1. 무전유죄 유전무죄, 돈으로 합의만 보면 폭행, 성폭행 다 용서되는구나. 2. 성폭행하고 몇천원만 주면, 여자가 댓가를 바랬다고 남들이 알아서 생각해 주는구나. 3. 성폭행범은 떳떳하게 살 수 있고, 피해자는 도망가야 하는군. 4. 이런 나쁜 놈을 잡을 때도 절대 상처를 입히면 안되는 초능력이 있어야겠구나. 5. 남을 도우면 손해가 크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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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훈을 일찍 깨달은 아이들이 점점 늘어가더군요.
성폭행범을 잡아 경찰서에 갔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 고교 3학년 때는 인근 학교에서 첫 부임한 여교사를 10여명의 학생들이 교내에서 집단 성폭행하고, 주동한 운동부가 폐쇄된 일이 생겼습니다. 그중에는 제 친구도 몇명 있더군요. 이 사건은 명문고교의 명예(?)를 위하여, 조용히 묻혔죠.
- 다른 무리들은 1년을 몇일 간격으로 밤 10시 하교하는 여학생들을 무작위로 골라 성폭행을 해도 무사하더군요. 이 친구들은 사실은 여학생들도 즐기는 것이라 했고, 한때는 저도 정말 믿었습니다.
- 조금 더 대담한 녀석들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유인하여,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아 동참시키더군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 더 상습적이고 행동범위가 넓어지구요.
-왜 제가 길을 걸어가면 꼭 근처에서 성폭행범이 눈에 보이는 건지. 남 일에 참견하지 말자는 교훈을 잠깐 까먹고, 대학시절 또 다른 2번의 사건에 휘말렸네요.
-초등~여대생,직장인, 할머니까지 다양한 성폭행피해자를 병원에서 만났습니다(내과가 문슨 상관이냐고요? 그래요. 제가 참견하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가족들이 더 열받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남들이 보는 그 상황에서 혼을 내고, 남 부끄럽다는 말을 하는 부모들도 가해자로 보이더군요.
물론 드물게 철창신세를 지는 경우도 보았지만, 그건 교통신호위반 딱지를 떼일 때처럼 '운이 없어' 생긴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다들 생각할 뿐입니다. 아닌가요?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며
지난 2004년 밀양연합 사건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와 경찰의 인권의식수준이 전국민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20년전 제가 경험한 것이나, 4년전 밀양에서 여학생이 경찰서에서 겪은 것 마찬가지였으며, 얼마전 밀양사건의 추적보도를 봐도 지금까지 크게 변한 것은 없더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선 경찰관 몇명 해고하고, 성폭행 형량 조금 늘린다고 해결될 것 같으면 옛날에 다 끝날 문제였죠.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사법제도와 국민의식을 개혁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교육하고, 성인들도 재교육해야 합니다. 정말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빨리빨리'로 대충 처리해서는 항상 도루아미타불입니다.
언론은 시청률이나 좀 올려보려고 선정적인 기사나 남발하고 있고, 일부 단체들은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이런 일이 있으면 인기용 구호나 남발하지 맙시다. 저는 선정적으로 취재/편집해서, 국민들을 잠깐 분노하게만 하는 언론에 더 화가 납니다.
-언론과 사회단체의 역활은 무엇인가요?
제 소원도 저런 의사의 면허박탈이지만, 이중처벌은 법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형벌체계를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비본질적인 선정적 내용으로 시간낭비하세요? 그리고, 저도 매일 그 의사가 사용했다는 프로포폴로 수면내시경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전신마취용 약물인 것처럼 과장하지 말아 주세요.
다수의 신문에서 처참하게 살해현장을 사진 1면에 낼 때, 그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사진과 함께 사건의 원인과 시민의 자세 등을 담담히 보도한 외국신문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언론과 사회단체들은 국민간의 반목과 질시를 유발하는 것이 아닌, 사건을 통한 근원적 문제를 밝히고, 해결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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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와 사회에 대한 고민(im.docblog.kr)
Posted by 한정호, MD (joungho@kma.org)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