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미적미적하는 사이 검찰 `전광석화' 행보
여론조사를 빙자한 여야 총선 예비후보들의 사전 선거운동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기 전 이미 경찰이 사건을 접수해 수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7일 확인됐다.
특히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연루된 이번 사건에 대해 `친정'인 경찰이 지나치게 미온적인 수사를 벌이다 결국 검찰의 손에 사건을 넘겨주게 됐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반면 검찰이 수사권 독립을 주창했던 허 전 청장에게 유독 초점을 맞춰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경찰쪽의 의심스런 눈초리도 있다.
◇ 경찰, `제 식구 감싸기'(?) = 이번 사건의 발단은 허 전 청장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짜여진 ARS 방식의 여론조사 전화가 서울 중구 주민 5만명에게 일제히 걸린 1월 중순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화가 평범한 여론조사가 아니라고 느낀 주민 2명은 1월 25일 관할 중부경찰서에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허 전 청장 측을 고발했다.
하지만 경찰은 중요 인물이 연루된 총선 사건인데도 일주일이 지난 2월 1일에야 고발인 조사를 마쳤다.
이후 경찰은 문제의 전화가 걸려온 번호를 추적했는데 20일 가까이 지난 2월 20일에야 전화 회선을 신청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혀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구속된 텔레마케팅 업자 문모(36)씨는 이 같은 수사 기관의 추적에 대비해 미리 통신 사업자에게 남의 이름으로 사용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을 모른 채 통신회사를 통해 파악한 명의상 신청자를 쫓던 경찰의 수사는 이후 답보 상태를 보였고 이에 답답함을 느낀 고발자들은 2월 중순께 다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기초적인 고발인 조사가 늦어지는 등 수사가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중부경찰서 관계자는 "고발장을 받고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절차를 밟아서 조심스럽게 수사를 해 왔다"며 "전체적으로 수사해 성과가 나올 단계였는데 검찰이 중간에 들어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 `가속 페달' 밟는 검찰 = 허 전 청장에 대한 고발을 접수한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수 사건' 형태로 별도 수사에 착수했다.
2월 19일께부터 본격 수사를 벌이기 시작한 검찰은 일주일 가량의 수사 끝에 문씨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신청서류 등을 위조해 놓은 사실을 간파하고 그가 운영하는 텔레마케팅 회사 사무실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검찰은 이를 통해 문씨가 예비후보들 측으로 추정되는 12명의 인물들과 맺은 계약서를 확보했으며 계좌추적을 병행해 총 계약액 4천200만원 가운데 실제로 2천800만원이 의뢰자들로부터 문씨에게 건네진 사실을 밝혀냈다.
아울러 실제로 문씨가 12명의 여야 예비후보들에게 해 준 여론조사를 빙자한 사전 선거운동에 사용된 각종 음성자료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검찰은 2월 29일 이번 사건의 주범 격인 문씨를 체포해 3월 6일 구속기소할 수 있었다.
한편 검찰은 이중수사 논란이 일고 있는 점을 감안해 최근 중부경찰서 수사팀에 사건 일체를 검찰에 넘기고 손을 떼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놓고 경찰 일각에서는 검찰이 수사권 독립 문제로 한때 심기를 건드렸던 허 전 청장이 수사망에 걸려들자 수사력을 집중해 `표적 수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허 전 청장 스스로도 "내가 수사권 조정 논란의 전면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허 전 청장은 또 "이번 사건은 현역 의원과의 경쟁 때문에 음해가 난무하고 있는 서울 중구에서 공천경쟁자들 측의 고소고발로 촉발된 것이다. 검찰은 여론조사를 해 준 12명의 후보자 중 나의 연루 여부를 집중 수사하고 있다"라며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처음부터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했더라면 고발인들이 다시 검찰에 수사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드러난 범죄 정황이 있으면 수사를 하는 것일뿐"이라고 밝혔다.
차대운 신재우 기자 setuzi@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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