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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내 인생의 연애편지

등록 2008-03-14 11:17

지난 연초였다, 오랫만에 지상비행을 하는 KTX 를 타고 차창밖 속도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기억의 색은 바랬지만 낮익고 반가운 얼굴이다.

그 : "혹시 포항 00대대 근무하던 김** 해병 아닙니까 ?"

나 : "어 ~! 이게 누구야. 정**해병 아녜요 ?"

나 : "야 ~! 이렇게 만나네. 이게 얼마만입니까"

군대에서 같은 중대에 근무하던 정해병이었다. 나보다 몇 기 앞선 고참이라 절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약간은 특별한(?) 사이었다. 해병대 시절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회포를 풀기에는 KTX가 너무 빨랐다. 내가 먼저 내리는 바람에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했다.


정해병이 먼저 전역한 후부터 연락이 끊어졌지만, 후일담을 들어 보니 정해병에게 나와의 인연을 대신해서 잇고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그의 아내였다. 내 인생의 필름을 26년 전으로 한참 되감아 재생해 본다.

내가 진해에서 6주 훈련과정을 수료한 후 '빨간명찰'을 달고, 포항에서 4주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실무배치된 부대가 마침 해안경계근무 중이었다. 그래서 첫 근무지가 칠포 해수욕장에 있는 작은 분초였다. 분초는 솔밭을 등지고 야트막한 모래언덕 위에 있어 해변 풍경을 감상하기엔 그만이었다. 비록 송충이 하나(이병)였지만 시간이 남았기에 바다를 보는 잡상들을 '수양록(군대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부대가 임무를 마치고 사단으로 철수하니 그날부터 일과가 말 그대로 지옥의 나날이었다. 어느날 소대 일직병이 내게 다른 소대 한 왕고참에게 총알같이 가보라고 했다. 가보니 삼류잡지 펜팔난의 주소로 보낼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내 '수양록'을 훔쳐본 누군가가 그 고참에게 나를 추천한 것이다. 쉬하고 뭐볼 틈도 없이 뺑뺑이 도는 졸병의 피같은 시간을 쪼개야 하니 탐탁이야 했으랴.

군댓말로 '대충철저히' 써주려 했지만, 답장이 한 통도 안올 경우의 후환이 두려워 성의있게 써준 게 발단이 되고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휴일에도 뒤집어 입기를 반복한 팬티조차 빨 시간이 없을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었다. 답장이 안오면 곡괭이 자루와 엉덩이가 몇 차례 만나고 나면 끝인데(그땐 그랬다), 왜 그렇게 꼬박꼬박 답장이 오는지. 표준문안이면 다 되는 '부모님전상서'보다 매번 내용이 달라야 하는 연애편지 쓰기는 곤혹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문제가 생겼다. 기억이 새는 바람에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써 주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칫 받는 이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다 견본을 써서 매주 수.토요일 게시판에 붙여두는 해병대 역사상 초유의 이색작전을 감행했다. 개인의 취향대로 짜집기해 쓸 수 있도록 여러 문장을 만드는 배려도 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고 심심찮게 군 문예대회에 나가 입상해 맛있게 타먹은 포상휴가는 보너스였다.

그때 정해병의 편지는 많이 다듬어 주었다. 취침시간이면 살며시 뇌물(빵.우유.솔담배)과 함께 받은 편지를 들고왔으니 둘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 덕택인지 정해병은 양다리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쪽은 편지 내용과 미모로 미루어 보니 소양이 있어 보여 정해병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말이지만 사실 정해병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 꼴통'이었다.

정해병은 전역 후, "저런 여자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생각하고 팔자에 없을 줄 알았던 공부를 해 전문대학도 나오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결혼에 골인하고 나서 한참있다가 아내에게 고백하고, 이후 나를 찾았지만 찾지못해 늘 궁금했다고 했다. 살면서 자기는 아내 덕을 많이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나를 다시 만났으니 정해병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회상하니, 겉만 화려한 문장에 넘어가 해병대 아내가 된 여인이 더 있을까 싶어 걱정이 은근하다. 머리에 쇠똥이 겨우 벗겨진 나이로 남의 연애에 리모컨질(?)해 잘못된 인연을 만들어 주지나 않았는지. 그래도 정해병처럼 자신의 부족을 채우고 결혼에 골인해서도 잘 사는 모습을 보니 죄진 건 아닌가 보다. 정해병과 성격이 비슷한 동기녀석 하나도 특별관리 덕에 아내와 인연이 되어 잘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더 있다. 한참 늦었지만 나 자신도 내 글을 보고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녀와 인연이 되었다. 그녀가 큰 시련의 길을 걷고있을 때 내가 보내주는 글은 그녀에겐 희망이었다. 그 과정에서 글과 대화에 담긴 가치관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나 어쨋다나. 정말 그랬다. 국내 모 항공사 수석 승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내 아내는 내게는 참 과분한 사람이다. 이랬으니 내 인생 최고의 연애편지는 당연히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다.

이날까지 시속 몇 킬로로 세월을 달려왔을까. 돌아보니 KTX 만큼이나 빨리 달려온 것 같다. 이제는 세상의 모습을 속살까지 들여다보며 내 인생에게 연애편지를 쓸 나이다. 그 글들과 내 아내와 내가 주고받는 연애편지도 차곡차곡 모았다가 '내 인생의 연애편지'라는 이름의 책을 한 권 만들어도 되려나. 그랬으면 한다. 사람들에게 내어 놓아도 주제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나이에 말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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