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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어떤 무임승차

등록 2008-03-19 10:55

모처럼 한 번씩 상경을 하노라면 길눈이 어두운 나는 매번 쩔쩔맨다. 더욱이 환승역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 탈 때는 긴장하여 허둥대기 일쑤다. 그런데 남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지하도를 내려서면 장맞이를 하는 노숙자의 십중팔구는 내가 어수룩해 보이는지, 아니면 신수가 좋아 보이는지 다가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러니 사람 좋아 보여 관심을 보이는 건 좋은데, 이만저만 더 신경이 쓰이고 피곤함을 무릅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작가회 정기총회가 있어 모임에 참석하려고 지하로 향하니 40대 중반의 한 노숙자가 다가와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랬지만 나는 냉정히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전에는 몇 차례 이들을 만나면 지폐를 꺼내 주었지만, 그렇게 동정하다보면 먹이를 받아먹고 사는 짐승이 야성을 잃어버리듯이 그렇게 살도록 하는데 일조 하는 격이 되는데다, 나아가 멀쩡한 허우대로 비럭질을 하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하도를 벗어나 승차권 발매소에서 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줄 뒤에 서 있다가 또 다른 접근자와 대면하게 되었다. 이날따라 판매대 앞에는 이중삼중의 행렬이 꼬리를 잇고 있어 복잡했는데, 어떤 할머니가 쭈볏거리며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금방 두 장 받았는데 하나 쓰세요."


하며 승차권 한 장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게 웬 일이야?' 싶어 들여다보느라 미쳐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그 할머니는 벌써 총총걸음으로 개찰구 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을 그 할머니의 뒷모습과 승차권을 번갈라 보며 '세상을 살다보니 별의 별일도 다 있구나' 생각 했다

그 승차권은 유료 승차권과는 달리 흰색이었다. 그걸 새삼스레 확인하니 내가 경로우대 대열에 바짝 다가서긴 했지만, 해당자로 보았나 싶어서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는 시시하게 거짓부렁의 사술을 쓰거나, 암체같이 월장을 하지도 않고서 아주 당당히 가로막대를 통과하여 차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차를 타기는 했으나 내내 마음 한편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한때 남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귀찮은 일이거나 그렇지 않는 일을 떠나 서 어쨌던 기적 같은 행운을 안겨준 것은 시실이어서 무슨 일을 당함에 있어서는 꼭 유 불리를 따져 판단할 일은 아닌가 한다.

전에 한때 정치권에서 지역감정 문제가 이슈화되었을 때, 푸대접 이야기가 나오자 하는 말이 '푸대접이라도 좋으니 . 무대접 신세나 면했으면 한다' 는 말이 떠돌았지만, 그처럼 철저히 무시 수준의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게 그래도 나은 게 아닐까.

매번 전철을 타며 허둥대면서도 오늘 겪은 일을 생각하면 내 생에 이만한 화젯거리도 없겠다 싶고, 그것이 비록 과분하여 황망한 재수는 아닐지라도 '자다가 일어나 콩떡 얻어 먹는' 행운은 아니었나 싶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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