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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슬픈 전철 풍경

등록 2008-03-24 16:10

석 주 전 낮에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묘에서 노량진까지 갈 일이 있었다. 동묘앞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는데, 낮 시간이라 그런지 승객은 많지 않았다. 종로3가와 종각을 지나면서 승객들이 많이 내려, 내가 탄 객차는 거의 텅 비다시피 하였다. 멋적게 계속 서있기가 뭐하여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7~8명 정도 앉을만한 자리에 나하고 초로의 아줌마가 떨어져 앉았고, 맞은편 좌석에는 50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와 6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그리고 좀 떨어져서 젊은 연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종각역을 지나면서 어떤 깡마른 할아버지가 돗자리 서너 개를 지고 나타나 팔기 시작하였다. 재미있는 건.. 일반 잡상인처럼 일장연설을 하고 파는 게 아니라, 뭐라 궁시렁궁시렁거리고는 내가 앉은 좌석의 초로의 아줌마에게 달라붙어 돗자리를 사도록 설득하였다. 그 아줌마는 단호하게 안 사겠다고 하질 못하고, 사고는 싶은데 돈이 없다는 말로 일관하였다. 그러니 돗자리 할아버지는 이거 잘 하면 하나 팔겠다 싶었는지, 3만원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면서, 물건은 보다시피 이렇게 좋으니 얼른 사라고 졸라대기를 계속하였다.

그렇게 시청도 지났다. 나는 할아버지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강매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라고 간섭하고 싶어졌지만, 좀 더 참자.. 하고 좀 더 지켜보았다.

그런데 전철이 서울역을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서울역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웬 건장한 남자가 조그만 수레를 들고 탔는데, 전철이 출발하자 자기 수레를 문간에 세워 두고는 이 할아버지에게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와, 이렇게 강매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타일렀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준 그 남자가 기특해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이 무슨 유니폼 비슷한지라, 그저 역무원인가 보다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젊은이의 말을 더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젊은이도 전철 잡상인이었다. 그가 할아버지를 몰아붙이며 경로석 근처로 가서 한 말의 골자는 이렇다.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승차했느냐? ... 지금 서울역에만도 이런 판매원들이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열 명이나 기다리고 있다. 나도 이 차에 오르기 위해 앞서 대여섯 대를 그냥 보내야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군데 이런 식으로 깽판을 치느냐? ..."

할아버지도 지지 않았다. "아니.. 내가 내 물건 가지고 파는데, 젊은이가 왜 나서서 방해냐? ..." 말이 안 통하자, 갑자기 그 젊은이는 손바닥으로 할아버지 가슴을 세게 밀어쳤다. 할아버지는 휘청하며 경로석에 주저 앉았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50쯤의 아줌마가 괄괄한 목소리로 그 젊은이를 나무라며 개입하였다. 그 옆의 할머니도 개입하는 바람에 나는 아무런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다음 남영역에서 내렸다. 전철이 다시 출발하자 그 젊은이는 승객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자신이 할아버지를 밀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 골자는 위의 내용과 같은데, 거기에 첨부한 하소연은 이렇다.

"난 할아버지에게 처음에 좋은 말로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 할아버지는 이런 경험도 별로 없고 물정도 잘 모르는 분인 것 같다. 그래서 좋게 좋게 말씀드린 거다. 그런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로 밥 먹고 산다. 어렵게 내 차례가 되어 탔는데, 저 할아버지가 이미 다른 물건을 팔고 있는 걸 보는 순간 너무 화가 났다. 승객 어르신들께는 죄송하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이 객차에서는 판매행위를 하지 않고, 앞의 칸으로 건너갔다. 창을 통해 얼핏 보니 그 칸에서 판매행위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사건이 종결되자, 아줌마들의 품평회가 열렸다.
"그 할아버지도 참 머리를 써야지.. 아직도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여름용 돗자리를 팔면 누가 사겠어요? 글구 누가 전철에서 3만원짜리 물건을 사겠어요? 끽해야 1~2천원이지.."
"저렇게 허술하게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조심해야 해요... 힘든 척하면서 등치는 사람 많아요.."
"맞아요.. 나도 할머니지만, 특히 할머니 조심해야 해요.. 내가 얼마 전에 한 거렁뱅이 할머니가 측은해서 도와주려다가 그 할망구가 갑자기 내 지갑을 채고는 쓰리해갔어..."
"나도 그런 할머니 얘기 들은 적 있어요.."
"아따.. 근데 그 젊은 양반 무섭네.. 눈에서 막 불이 나더구만.. 잡상인도 지들끼리 무슨 규정이 다 있나 보죠?"
"당연히 있겠지.. 우리나라는 뭐든지 나와바리가 있잖아.. 할아버지가 참 세상 물정 모르네.. ㅉㅉ"
품평을 더 듣고 싶었는데, 그만 전철이 벌써 한강을 건너 노량진 역에 도착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내려야 했다.

역사를 나오면서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슬펐다. 다들 열심히... 그러나 힘들게 사는구나.. 이런 게 "인생"인가.. 근데 나는 너무 편하게 사는 거 아닌가.. 이런 게 "사회"인가... 그래도 슬픈 구석 저편에서 새로운 지식을 하나 얻은 게 있어서 좋았다. 전철 잡상인들은 엄청 많은데도 난 그동안 한 번도 두 잡상인이 한 칸에서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가 명쾌하게 풀렸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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