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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시술한 환자가 사경을 헤멜 때 의사의 심정

등록 2008-03-25 11:34

간략한 ERCP 도해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간략한 ERCP 도해 / 한겨레 블로그 한정호

지난 일주일은 정신 없이 보냈습니다. 2년여를 대장암을 투병한 선배가 돌아가신 까닭도 있지만, 제가 시술한 할머니가 사경을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합병증에도 불구하고 필수적인 시술, ERCP

제가 주로 하는 일이 역행성 담췌관조영술(ERCP, 쉽게 담도내시경)이라고 소개한 적 있습니다. 모든 소화기내과의 시술 영역에서 가장 사망률과 합병증 발생률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구하는데 필수적이며, 담도와 췌관의 질환의 진단/치료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감수하는 시술입니다. -> 칼럼 : 담도내시경과 의료사고


지난 월요일 경도의 황달을 주증상으로 개인의원에서 의뢰된 86세 할머니에게 담도내시경을 시술하였습니다. 입원 전 CT에서는 담도암이 강하게 의심되었기에 담도내시경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자세한 의학적 이야기는 제외하겠습니다. 관심있으시면 검색부탁드려요.)

담관이 십이지장으로 열리는 부위에 장을 둘러싸는 근육이 없어 발생하는 주머니(게실)이 있어 담관을 뚫기가 어렵지만 그럭저럭 잘되었고, 이 입구를 전기칼로 째고(흔히 레이저라고 부름), 담관을 관찰하였습니다. 다행히 담관암을 의심할 것은 없었과, 작은 담도결석들이 담관을 막아서 생긴 황달과 담관확장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시술을 무사히 마치고, 장천공 등의 합병증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X-ray 검사도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담도내시경에 의한 합병증으로 장천공과 심한 복막염이 생겨

화요일 아침 혈액검사에서 약간의 췌장염 소견이 있어 금식을 계속 유지하였으나, 할머니의 상태는 너무 좋아서 산책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새벽부터 심한 복통을 호소하더군요. 응급으로 초음파검사를 시행하였는데, 우측 맹장주변에 복수가 차있어서 맹장염이 의심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CT를 준비하여 오후에 촬영을 하였는데...... 웬 걸, 장천공에 의한 복막염이었습니다. 담도내시경 시에 담도입구에 낸 구멍이 아물지 않고 터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응급으로 다시 담도내시경을 했습니다.

ERCP시 담도가 십이지장으로 열리는 부위(유두부)를 찟는 사진, 구멍 상단의 주머니가 게실이며 천공이 잘된다. 2~3mm 만 터져도 멸균상태인 복막에 염증이 심하게 파급된다. 사진출처:건국대병원홈페이지
ERCP시 담도가 십이지장으로 열리는 부위(유두부)를 찟는 사진, 구멍 상단의 주머니가 게실이며 천공이 잘된다. 2~3mm 만 터져도 멸균상태인 복막에 염증이 심하게 파급된다. 사진출처:건국대병원홈페이지

역시나 2일전 찟은 부위 옆으로 구멍이 난 것이 의심되네요. 나이가 먹다 보면, 장을 둘러싸는 근육도 없어져 얇게 변하 부위(게실)쪽으로 쭉 구멍난 것이 보이더군요. 이런 지연형 천공이 간혹 있습니다. 급한데로 담도로 여러개의 튜브를 박았습니다. 그래서 구멍난 쪽을 눌러서 담즙과 장액이 복강내로 새는 것을 막아, 자연 봉합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초조해하는 보호자들에게 각오하고 설명을 했는데...

6~7명의 초조해하는 보호자들에게 갑자기 이런 합병증이 발생되어 죄송하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욕 먹는 거야 워낙 익숙해져 있어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만, 솔직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 마음도 가볍고 앞으로 이 환자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더 이성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원칙적으로 개복수술을 하여 구멍난 부위를 매꾸는 것이 추천되지만, 지금 취한 조치로 수술을 안하고 회복되기를 기다려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 두가지 방향 모두 극단적인 장단점이 있습니다. 워낙 고령이어서 수술 후 회복이 안되어 사망할 수도 있고, 빨리 수술을 안하여 장이 썩어들어가서 죽을 수도 있으며, 어짜피 수술을 해야한다면 빨리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란는 후회/원망이 있으니까요.

이런 의료사고가 발생한 상황에서 냉정하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이고, 사전 동의가 되어 있지만, 제 입장에서도 죄송한 일이고 일말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친척 어르신이 바로 고성과 반말로 병동을 아수라장으로 만드시더군요. 그런데 가장 공격적일 것으로 예상했던 보호자가 중재를 하시더군요. 바로 머리가 하얀 막내아드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하셨는데 발생한 것인데 왜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시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주십시요."

정말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단, 보호자/환자에게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도 냉정한 선택을 못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그냥 수술하라고 할지, 위험부담을 안고 기다려 볼지

사실 보호자가 공격적이면 제 입장에서는 그냥 수술을 하라고 하면 그만인 면이 있습니다. 늦게 수술해서 괜히 고생만 더 시켰다고 욕 먹을 소지도 줄이고, 일단 제 눈앞에서 안보이니 제 마음도 편하고, 수술을 연기하는 만큼 복강내 농양과 폐혈증으로 사망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만일 환자가 사망할 경우 소송에서도 제가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장천공은 담도내시경에서 종종 발생하며 다른 병원의 소송사례도 많이 있고, 저도 이미 겪어습니다.)

몇일만 지켜보고 할머니 상태가 안좋아지거나 하면 바로 응급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2번은 외과선생님을 찾아 뵙고, 어디 멀리 가있지 마시라고 음료수 공세 중입니다.

다행히 목요일에만 열이 39도까지 올랐다가 떨어졌고, 이후에는 열도 안나고 복통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코를 통하여 간과 위에 각각 튜브를 넣어 놓아 많이 불편하고, 고령에 심장이 안좋아 폐에 자꾸 물이 차서 불안불안하기는 하지만, 오늘(일요일)까지는 희망이 보이네요.

추신: 1. 의료사고와 과실은 교통사고와 과실과 같은 개념입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손해는 사고이기는 합니다만, 그중에 과실있는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모든 사고를 과실로 몰면, 침습적인 치료는 아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보약이나 먹이며 죽으나 사나 구경하는 것 밖에는 없겠죠. 그렇다고, 명백한 과실을 사고라고만 해도 물론 안되겠죠.

2. 금요일에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지금(일요일)까지도 이불 뒤집어 쓰고 노트북으로 타이프를 치고 있습니다. 선배들에게 이 할머니 돌아가시면 사표낸다고 쑈(?)를 했습니다. 외과나 저 같이 침습적인 분야를 하는 의사들은 하루에도 열두번은 때려치고 싶고, 술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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