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재단정상화 동참 요구한 최찬식씨
영남대 재단정상화 동참 요구한 최찬식씨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청구대학을 설립한 아버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게 소원일 뿐입니다.”
대구에 사는 최찬식(81·사진)씨는 31일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설립한 아버지 최해청씨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영남대가 추진중인 재단정상화 논의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67년 학내사고 이후 정권에 강제헌납
대구대와 통합…20년간 임시이사 체제
“진실 밝혀 설립자 부친 명예회복해야” 그는 20여년 동안 청구대가 권력에 의해 영남대로 넘어갔다고 호소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말룡 전 의원 등을 만났으며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교육부 장관과 과거사위원회 등에 셀 수도 없을 만큼 편지를 보냈다. 영남대를 비롯해 임시이사가 파견된 전국 여러 대학에서 재단정상화를 추진하는 움직이 일기 시작한 2년 전부터 그는 매우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간신문 여섯 가지를 구독하며 관련 기사를 찾아 밑줄을 쳐가며 읽는다. 거실에는 각 언론사별로 신문을 스크랩한 자료들이 차곡차곡 정리돼있다. 인터넷 검색도 빼놓지 않아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언론사와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를 찾아 나선다. 또 교육부 관계자들과 영남대 재단이사들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교수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보내고 있다. 해청씨의 둘째 아들인 그는 1999년 미국 유학을 접고 영구귀국했다. 10·26이 터지던 79년과 87년 6월 항쟁 때도 잠시 귀국했지만 “아직은 아버지 명예회복에 나설 때가 아니다”라고 판단해 다시 돌아갔다. 영구귀국한 뒤 그는 아버지가 미국으로 써 보낸 편지와 일기, 청구대 대학신문 등을 토대로 500쪽 짜리 책 <청구증언>을 펴냈다. 청구대는 아버지 최씨가 48년 대구에서 항일운동과 청년운동을 하면서 설립했다. 14회에 걸쳐 3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난 67년 6월, 학교 증축공사 현장이 무너져 수많은 노동자들이 숨지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이 사고를 수습한다며 일부 재단 관계자와 교수들이 청구대를 청와대에 헌납했다. 설립자 최씨는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효상 국회의장과 김성곤 공화당 국회의원 등 권력 실세들에게 호소해봤지만 역시 허사였다. 67년 12월, 청구대는 결국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씨가 세운 대구대와 합쳐져 영남대가 됐다. 초대 총장과 재단 이사장은 청와대에서 보낸 인사들이 맡았고 설립자는 철저히 배제됐다. 당시 일부 재단이사들이 청구대 운영권을 박 대통령에게 일임한다고 써준 각서가 아직도 남아있고, 영남대 재단 정관 제1조에는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혀 있다. 권력이 개입한 증거가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대구/글·사진 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
대구대와 통합…20년간 임시이사 체제
“진실 밝혀 설립자 부친 명예회복해야” 그는 20여년 동안 청구대가 권력에 의해 영남대로 넘어갔다고 호소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말룡 전 의원 등을 만났으며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교육부 장관과 과거사위원회 등에 셀 수도 없을 만큼 편지를 보냈다. 영남대를 비롯해 임시이사가 파견된 전국 여러 대학에서 재단정상화를 추진하는 움직이 일기 시작한 2년 전부터 그는 매우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간신문 여섯 가지를 구독하며 관련 기사를 찾아 밑줄을 쳐가며 읽는다. 거실에는 각 언론사별로 신문을 스크랩한 자료들이 차곡차곡 정리돼있다. 인터넷 검색도 빼놓지 않아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언론사와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를 찾아 나선다. 또 교육부 관계자들과 영남대 재단이사들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교수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보내고 있다. 해청씨의 둘째 아들인 그는 1999년 미국 유학을 접고 영구귀국했다. 10·26이 터지던 79년과 87년 6월 항쟁 때도 잠시 귀국했지만 “아직은 아버지 명예회복에 나설 때가 아니다”라고 판단해 다시 돌아갔다. 영구귀국한 뒤 그는 아버지가 미국으로 써 보낸 편지와 일기, 청구대 대학신문 등을 토대로 500쪽 짜리 책 <청구증언>을 펴냈다. 청구대는 아버지 최씨가 48년 대구에서 항일운동과 청년운동을 하면서 설립했다. 14회에 걸쳐 3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난 67년 6월, 학교 증축공사 현장이 무너져 수많은 노동자들이 숨지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이 사고를 수습한다며 일부 재단 관계자와 교수들이 청구대를 청와대에 헌납했다. 설립자 최씨는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효상 국회의장과 김성곤 공화당 국회의원 등 권력 실세들에게 호소해봤지만 역시 허사였다. 67년 12월, 청구대는 결국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씨가 세운 대구대와 합쳐져 영남대가 됐다. 초대 총장과 재단 이사장은 청와대에서 보낸 인사들이 맡았고 설립자는 철저히 배제됐다. 당시 일부 재단이사들이 청구대 운영권을 박 대통령에게 일임한다고 써준 각서가 아직도 남아있고, 영남대 재단 정관 제1조에는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혀 있다. 권력이 개입한 증거가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대구/글·사진 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